아버지의 눈물
얼마전 아버님의 친구분들이 충주의료원에 입원중인 아버님을 오랜만에 병문안을 하셨는데 아버님이 친구분들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가슴 아파하시며 살아계실때 잘하라고,또 가끔 찾아 보겠노라고 인사 하시고 가신적이있다.
그때는 치매가 있으시지만 친구분들을 보시고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고 건강한 친구를 보시고 나는 왜 건강 관리를 못했을까 안터까와서 흘리는 눈물인줄로 생각을 했었다.
5월28일 충주의료원에서 전화가 왔다.
"오종월씨 보호자 되시지요?"
"예"
"병원에서 퇴원 명령이 내렸는데요. 몇시에 퇴원하실건가요?"
"예? 갑자기 왠 퇴원입니까?"
"과장님이 퇴원 하신다고 했다고 퇴원 명령을 내렸는데요."
"저는 퇴원 한다고 한적이 없는데....."하고는 어머님께 전화를 드리고 물어보자 퇴원 한다고
한적은 없고 병원에서 하라고 하면 해야지요 하셨단다.
의료수가 때문에 항생제를 쓰지 않으면 의료 수가가 떨어져 퇴원했다가 다시 들어 오란다 . 지금 까지 여러번 퇴원 입원을 반복해서 가족들도 모두 지쳐있다.
급히 요양 병원을 알아 보고 그쪽으로 옮기려고 하자 병원비가 얼마나 나오냐고 물어보시기에 한달에 130만원 이래요 하자.
병원 생활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좀더 싼곳을 찾아 보자고 하신다. 그동안 여러날 동안 병간호 하시고 병원 들락날락 하시느라 자식 보다는 어머님이 힘드신것은 당연하시고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적게 주시려고 많은 배려를 해주신다.
어머님은 키가 165cm가 되신다.
지금은 큰키가 아니지만 왜정시대때는 키가 커서 창피해서 구부리고 다니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게 버릇이 되어서 지금도 약간 머리를 숙이고 다니신다.
내가 봐도 예쁘신 어머니 (유열자님을 우리 이모 닮았다고 이모라고 했는데 유열자님 보다 조금 더 예쁘시다. 아닌것 같으면 오셔서 확인하셔도 좋다).
아버님이 의처증이 있으셔서 젊어서 부터 모진 구박에 구타에 온갖 수모를 격어 오시면서도 이혼은 안된다는 그 생각으로 또 자식을 버릴수 없다는 생각으로 참고 참고 살아 오셨다.
술만 드시고 들어 오시는 날이면 온가족이 두려움에 공포에 떨고 살았다.
이웃집으로 피난 다니고 주먹에 맞아 코피 터지고 울고 불고 살았던것이 나의 어린시절의 기억의 전부이고 따뜻한 모습의 아버지 상은 정말 찾아 볼수가 없다.
왜 그렇게 사셨을까?
지금의 우리의 생각으로는 전혀 감조차 잡을수 없는 일 일것이다.
"엄마 이혼하고 우리끼리 살아, 아버지 없어도 좋아" 하며 엄마에게 울면서 하소연 하던 기억이 한두번이 아니다.
정말 그래야 우리가 행복해 질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머님은 우리를 위해서 한번도 실천해 본적이 없다.
어머님 자신이 당하신 고난의 세월을 생각하시면 모른체 내버려 둘것도 같은데 자신이 지고갈
십자가 인양 마냥 지고 가신다 .
가끔씩 푸념 섞인 말투로 "내가 무슨 죄가 많다고"하시지만 더 이상은 말씀을 아끼신다.
어머니 자신도 몇년전 유방암 수술을 하시고 힘드셨지만 힘차게 이겨내시고 지금도 (75세)동대문 남대문으로 밤시간에 물건을 하러 다니신다.
건강하게 사시려고 그리고 못난 자식 뒷바라지 하시려고.....
어느날인가 교회에서 선배 장로님 한분이 아버지 학교에 등록금을 냈다고 아버지 학교에 나가 보라고 하신다 .
등떠밀려 다닌 5주간 일정의 아버지 학교이지만 그곳에서 나도 아버지를 닮아 가고 있었구나 하고 실감을 하고 말았다.
아버지처럼 살지 말아야지 되뇌이고 되뇌이며 좌우명처럼 생각하고 살았지만 어느날엔가 멀리서 본 나의 모습은 나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컴퓨터를 부수고 구타하고 상처를 주면서도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집에 사로 잡혀있었다.
아버지 학교의 과정을 하나하나 해나가면서 자식과 사이의 응어리진 병든 모습을 치유해 가며 아들에게 용서를 빌고 둘이 부둥켜 안고 울던 일들이 그나마 조금은 나자신에게 위안이 된다.
이것도 나의 또하나의 교만이겠지만.
어쩌다 우리 가정에 흉만 보게 되었나 본론으로 돌아와서 다시 여기저기 알아 보는데 가게에서 일하시는 누님이(직원) 어디 어디 가면 가격도 싸고 친절하게 잘 돌봐 준다고 한다.
그곳에 가서 원장님을 만나 면담을 하고 문경에 있는 제일 병원으로 모시기로 결정을 하고
아버지에게
"아버지 문경으로 가시게 되었어요" 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아버지 어디로 가시는줄 아세요?". 묻자
발음도 정확지도 않으신분이 "문경"하고 대답을하신다.
어머님도 옆에서 보시고 계시다 "당신 어디로 가는줄 알아?"물으시자.
또 "문경" 하시며 눈물을 보이신다.
어 우리 아버지 우시네 하며 눈물을 닦아 드리고 병실에서 나왔다.
알콜성 치매로 가족들까지도 잘 알아보지 못하시면서도 내가 어떻게 될것 이라는것은 순간 순간 느끼시는것을 확인 할수있었다.
조금후 문경 제일병원에서 응급차가 와서 아버님을 모시고 문경으로 향하고 어머님 운영하시는 가게로 오자 어머님 친구분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사정을 설명해 드리고 아버님이 우시더라고 말씀드리자 네분의 친구분들이 모두 눈물을 훔치시면서 참 안되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이제는 오랜 병 수발로 눈물 마저 말라 버렸구나 생각이 들면서 울컥 치미는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가정 보다는 남을 생각 많이하셔서 우리 아버지는 이래 하면 그럴분이 아닌데 하는 반응을 보이는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 이었다.
어느날인가 우리 어머님이 다니시던 교회의 목사님이 교회 문제로 사직을 하고 서울로 떠나려고 인사차 어머님 가게에 들르신적이 있었는데 우리 아버님 평생 다니시던 회사를 퇴직하시고
퇴직금을 넣어둔 통장과 인감 도장을 목사님께 드리며 목사님 충주떠나지 마시고 이돈으로 건물 빌려 새롭게 시작하시라고 교회를 다니시지도 않으시던 분이 목사님께 용기를 주시며 우리에게는 목사님이 잘못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냐며 목사님께 그러면 안된다고 충고도 해주시던분인데 이제는 자신의 의지도 간데 없고 남이 하자는데로 몸을 맡기시고 이제는 죽음 만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
우리의 인생길 이처럼 짧은데 왜 사는 동안은 영원 할것 같은지.
아버님 살아계실때 효도하라고 하는데 병원에 누워만 계시니 어떻게 해야 하나요?
원망만 많이 했던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아버지의 흔적을 여러군데 남겨 둘께요.
나의 좋은 음성도 아버님이 주셨고 흰머리 안나는것도 모두 아버님의 선물인데 고맙습니다.
또 아버님 덕분에 세상에서도 존경 받으며 살고 있는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자랑스러운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때는 치매가 있으시지만 친구분들을 보시고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고 건강한 친구를 보시고 나는 왜 건강 관리를 못했을까 안터까와서 흘리는 눈물인줄로 생각을 했었다.
5월28일 충주의료원에서 전화가 왔다.
"오종월씨 보호자 되시지요?"
"예"
"병원에서 퇴원 명령이 내렸는데요. 몇시에 퇴원하실건가요?"
"예? 갑자기 왠 퇴원입니까?"
"과장님이 퇴원 하신다고 했다고 퇴원 명령을 내렸는데요."
"저는 퇴원 한다고 한적이 없는데....."하고는 어머님께 전화를 드리고 물어보자 퇴원 한다고
한적은 없고 병원에서 하라고 하면 해야지요 하셨단다.
의료수가 때문에 항생제를 쓰지 않으면 의료 수가가 떨어져 퇴원했다가 다시 들어 오란다 . 지금 까지 여러번 퇴원 입원을 반복해서 가족들도 모두 지쳐있다.
급히 요양 병원을 알아 보고 그쪽으로 옮기려고 하자 병원비가 얼마나 나오냐고 물어보시기에 한달에 130만원 이래요 하자.
병원 생활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좀더 싼곳을 찾아 보자고 하신다. 그동안 여러날 동안 병간호 하시고 병원 들락날락 하시느라 자식 보다는 어머님이 힘드신것은 당연하시고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적게 주시려고 많은 배려를 해주신다.
어머님은 키가 165cm가 되신다.
지금은 큰키가 아니지만 왜정시대때는 키가 커서 창피해서 구부리고 다니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게 버릇이 되어서 지금도 약간 머리를 숙이고 다니신다.
내가 봐도 예쁘신 어머니 (유열자님을 우리 이모 닮았다고 이모라고 했는데 유열자님 보다 조금 더 예쁘시다. 아닌것 같으면 오셔서 확인하셔도 좋다).
아버님이 의처증이 있으셔서 젊어서 부터 모진 구박에 구타에 온갖 수모를 격어 오시면서도 이혼은 안된다는 그 생각으로 또 자식을 버릴수 없다는 생각으로 참고 참고 살아 오셨다.
술만 드시고 들어 오시는 날이면 온가족이 두려움에 공포에 떨고 살았다.
이웃집으로 피난 다니고 주먹에 맞아 코피 터지고 울고 불고 살았던것이 나의 어린시절의 기억의 전부이고 따뜻한 모습의 아버지 상은 정말 찾아 볼수가 없다.
왜 그렇게 사셨을까?
지금의 우리의 생각으로는 전혀 감조차 잡을수 없는 일 일것이다.
"엄마 이혼하고 우리끼리 살아, 아버지 없어도 좋아" 하며 엄마에게 울면서 하소연 하던 기억이 한두번이 아니다.
정말 그래야 우리가 행복해 질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머님은 우리를 위해서 한번도 실천해 본적이 없다.
어머님 자신이 당하신 고난의 세월을 생각하시면 모른체 내버려 둘것도 같은데 자신이 지고갈
십자가 인양 마냥 지고 가신다 .
가끔씩 푸념 섞인 말투로 "내가 무슨 죄가 많다고"하시지만 더 이상은 말씀을 아끼신다.
어머니 자신도 몇년전 유방암 수술을 하시고 힘드셨지만 힘차게 이겨내시고 지금도 (75세)동대문 남대문으로 밤시간에 물건을 하러 다니신다.
건강하게 사시려고 그리고 못난 자식 뒷바라지 하시려고.....
어느날인가 교회에서 선배 장로님 한분이 아버지 학교에 등록금을 냈다고 아버지 학교에 나가 보라고 하신다 .
등떠밀려 다닌 5주간 일정의 아버지 학교이지만 그곳에서 나도 아버지를 닮아 가고 있었구나 하고 실감을 하고 말았다.
아버지처럼 살지 말아야지 되뇌이고 되뇌이며 좌우명처럼 생각하고 살았지만 어느날엔가 멀리서 본 나의 모습은 나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컴퓨터를 부수고 구타하고 상처를 주면서도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집에 사로 잡혀있었다.
아버지 학교의 과정을 하나하나 해나가면서 자식과 사이의 응어리진 병든 모습을 치유해 가며 아들에게 용서를 빌고 둘이 부둥켜 안고 울던 일들이 그나마 조금은 나자신에게 위안이 된다.
이것도 나의 또하나의 교만이겠지만.
어쩌다 우리 가정에 흉만 보게 되었나 본론으로 돌아와서 다시 여기저기 알아 보는데 가게에서 일하시는 누님이(직원) 어디 어디 가면 가격도 싸고 친절하게 잘 돌봐 준다고 한다.
그곳에 가서 원장님을 만나 면담을 하고 문경에 있는 제일 병원으로 모시기로 결정을 하고
아버지에게
"아버지 문경으로 가시게 되었어요" 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아버지 어디로 가시는줄 아세요?". 묻자
발음도 정확지도 않으신분이 "문경"하고 대답을하신다.
어머님도 옆에서 보시고 계시다 "당신 어디로 가는줄 알아?"물으시자.
또 "문경" 하시며 눈물을 보이신다.
어 우리 아버지 우시네 하며 눈물을 닦아 드리고 병실에서 나왔다.
알콜성 치매로 가족들까지도 잘 알아보지 못하시면서도 내가 어떻게 될것 이라는것은 순간 순간 느끼시는것을 확인 할수있었다.
조금후 문경 제일병원에서 응급차가 와서 아버님을 모시고 문경으로 향하고 어머님 운영하시는 가게로 오자 어머님 친구분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사정을 설명해 드리고 아버님이 우시더라고 말씀드리자 네분의 친구분들이 모두 눈물을 훔치시면서 참 안되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이제는 오랜 병 수발로 눈물 마저 말라 버렸구나 생각이 들면서 울컥 치미는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가정 보다는 남을 생각 많이하셔서 우리 아버지는 이래 하면 그럴분이 아닌데 하는 반응을 보이는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 이었다.
어느날인가 우리 어머님이 다니시던 교회의 목사님이 교회 문제로 사직을 하고 서울로 떠나려고 인사차 어머님 가게에 들르신적이 있었는데 우리 아버님 평생 다니시던 회사를 퇴직하시고
퇴직금을 넣어둔 통장과 인감 도장을 목사님께 드리며 목사님 충주떠나지 마시고 이돈으로 건물 빌려 새롭게 시작하시라고 교회를 다니시지도 않으시던 분이 목사님께 용기를 주시며 우리에게는 목사님이 잘못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냐며 목사님께 그러면 안된다고 충고도 해주시던분인데 이제는 자신의 의지도 간데 없고 남이 하자는데로 몸을 맡기시고 이제는 죽음 만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
우리의 인생길 이처럼 짧은데 왜 사는 동안은 영원 할것 같은지.
아버님 살아계실때 효도하라고 하는데 병원에 누워만 계시니 어떻게 해야 하나요?
원망만 많이 했던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아버지의 흔적을 여러군데 남겨 둘께요.
나의 좋은 음성도 아버님이 주셨고 흰머리 안나는것도 모두 아버님의 선물인데 고맙습니다.
또 아버님 덕분에 세상에서도 존경 받으며 살고 있는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자랑스러운 아버지.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