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에로티시즘

鄭宇東 0 1,537 2011.09.29 13:32
이런 저런 에로티시즘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는
구스타프 꾸르베가 그린 <세계의 기원>이란 충격적인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 그림의 적나라한 여자 성징표현에 깜짝 놀라 낯 붉히며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허기사 미국의 팝 아티스트 톰 웨셀만의 <위대한 미국 누드29>는 발기한 남성의 성징
을 그려놓고 있어 나에게 또 한번의 충격을 더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앞 그림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출발시키는 어머니의 소명에 충실하여 그린
그림이라면 뒤의 그림은 현대의 후안무치와 정신적 파탄을 상징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미국의 여류화가 조지 오키프는 꽃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레드 칸나와 한 송이 백합 같은 그녀의 그림을 보고 비평가들이 여성의 성징이 두드
러진다는 비평에 오키프는 "만약 내 그림에서 성적 상징을 보았다면 그것은 감상자가
자신의 집착을 보았을 뿐" 이라고 응수하며 그들의 속물근성을 강하게 질타하였습니
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비평가들의 혐의
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근래의 여성주의 그림시대에 들어오면서 오토 딕스의 그림은 성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는 경향마저 보입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에로티시즘을
메타포로 사용하지만 그는 성을 허구를 무너뜨리는 무기로 사용하여 인간의 성을
예술안에서 에로티시즘으로 번안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네를 타고 있는 밑에서 펄럭이는 치마속을 훔쳐 보고 있는 한량님의 가늘어진 눈.
물가에 선 여인의 물속에 비친 속살을 그린 화가의 끝내주는 관찰력은 소그림의 눈에
눈부처를 그려 자기그림의 확인 자료로 삼았다는 중국화가에 필적 할만 합니다.
우리나라 풍속화에서는 춘화라도 춧담 위에 남녀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방문을
닫아 건것으로 남녀 상열지사를 곱사하게 표현하는 은근과 점잖음이 있는데 비하여
일본 우키요에의 과장과 무염치는 서로 다른 국민정서의 일면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다고 하여 일본이 성애의 나라라고 치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내가 읽은 일본 작가 구라다 하쿠조오(倉田百三) 가 <사랑과 인식의 출발>에서
젊은 부부가 아침에 정교를 나누고 남편의 출근중 남편의 분신과 같이 있다고 생각
하는 장면은 성애를 멀리 초월한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숙자화가는 보리밭을 많이 그렸습니다.
<보리밭의 이브>는 꾀나 육감적인 포즈를 취하고 화장을 하여 뭇 사내들을 유혹하고
있으나 나는 보리밭 속에서 벌어지는 이브의 정사를 상상하는데 더 재미를 느낍니다.
상상과 연상의 재미는 이런 데도 있다 하겠습니다.
조선시대의 도화서에서 화원을 선발할때 실기외에도 문재시험이 있었습니다.
試題가 "봄의 꽃철에 온 길에 낙화가 만장하여 향기 또한 그득하여라" 인데
한 사람이 길위로 말을 타고 질주하니 흙먼지가 자욱한데 그 흙구름 위로 나비들이
무리지어 따라가는 그림을 그려 장원으로 선발 되었다는 이야기이니 연상의 재미외
에 이런 실재 현실사회에서의 실용적인 이익이 따르기도 합니다.

성경에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자라 정죄 하였습니다.
미술에서 보고 음욕을 품고 간음하는 것이 시간(視姦) 이라면
음악에서 듣고 음욕을 품고 간음하는 것은 청간(聽姦) 일텐데 --------
모리스 라벨이 전위 무용가 루빈슈타인의 의뢰를 받고 작곡한 무용곡 볼렐로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묘한 성적 감흥을 느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간단한 두가지 주제가 악기들을 추가해 가면서 약에서 강으로 크리센딩하는 주법
은 단조로운 느낌이 들지만 우리들이 태어나기전의 모체의 두근 두근하는 심장의
고동소리에 친숙하듯이 이 노래를 들으면 마냥 편안하고 안온한 느낌마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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