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관련 월북예술가를 중심으로

鄭宇東 1 1,894 2014.01.14 14:04
가곡관련 월북예술가를 중심으로

* 안기영(安基永, 1900∼1980)
충청남도 청양출생.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배재 중학에서 수학하였습니다.
당시 양악의 선구자인 김인식(金仁湜)·김형준(金亨俊)·이상준(李尙俊)으로
부터 노래를 배우면서 음악에 심취하였습니다.
1917년 연희전문학교에서 김영환(金永煥)으로부터 음악을 공부하였으며,
미국 오리건주의 엘리슨화이트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였습니다.
1928년에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습니다.
1947년 월북하여 공산주의식 해방 전사의 노래들을 작곡하여 공산주의 체
제수호에 앞장섰으며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작곡가로서 향토가극 분야를 새로 개척하여 경가극(오페렛타)을 본따
전통적인 우리나라 설화들의 이야기를 오음음계로 구사하여 안기영류 가극
의 바탕을 이룩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이러한 가극의 정착이 어
려운 상황이었으나 민족적인 정서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가극으로는 「콩쥐팥쥐」·「견우직녀」·「에밀레종」 등이 있으며,
동요로는 대표작으로 「그리운 강남」, 가곡으로는 「작별」·「마의태자」
등이 있습니다.

  * 정지용(鄭芝溶, 1902. 6.27~ ? )
나의 애창곡은 망향입니다. 나는 4월만 되면 망향이 부르고 싶습니다.
채동선이 처음 작곡할때는 정지용의 시"고향"에다가 곡을 붙혔는데 시인의
납북으로 이 가사가 금지되는 바람에 박화목의 "망향"과 이은상의 "그리워"
로 개사되어 불려졌습니다. 채동선이 작곡한 우리가곡은 12곡이라 들었는데
그중에 8곡이 모두 정지용시인의 가사였기때문에 사장되다싶이 되었는데
이제 "우리양악 100년"을 읽으면서 고향(망향)외의 7곡과 지용외의 시인의
네 작품도 이 기회에 메모하여 둡니다.
 
1) 고  향 -------- 망향(박화목 시), 그리워(이은상), 고향 그리워(이관옥)
2) 향  수 -------- 추  억 (이은상 시)
3) 압  천  ------- 동백꽃 (이은상 시)
4) 다른 하늘---- 그 창가에(모윤숙 시)
5) 또 하나 다른 태양 ---- 또 하나 다른 세계(이은상 시)
6) 바  다 -------  갈매기(이은상 시)
7) 몽랑풍 ------- 동  해(이은상 시)
8) 산엣 색시 들녘 사내  ------------  ?

09)ㅡ1. 모  란 -------------------- 김영랑 시
10)ㅡ2. 내 마음은 --------------- 김동명 시
11)ㅡ3. 갈매기 ------------------- 모윤숙 시
12)ㅡ4. 새벽길을 잊고 --------- 김상용 시

  * 윤복진(尹福鎭, 1907~1999)
나운영 작곡의 <아! 가을인가>는 나운영 작사로 나온 데도 있고
작사자가 김수경으로 나온 데도 있는데 이것은 월북 작가 윤복진의 필명인
김수향(金水鄕 또는 金貴環)을 한자를 잘못 읽어 金水卿으로 된 것인데,
월북 작사가의 노래가 금지곡이 된 상황에서도 다행스럽게도 살아 남는 계
기가 되었습니다. 이야기인 즉슨 김수향은, 김해경이 李箱의 별명을 가졌듯,
월북 작사가 윤복진의 필명었는데도 월북작품의 금제조치때 사전 조사에서
김수향이었더라면 끝나고 말았을 것을 김수경이었기때문에 검열에서 벗어
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친숙히 불러온 이 노래는,
이런 사실말고도 작곡자가 박태준이라고 하는 문제도 안고 있습니다.

윤복진과 박태준은 대구의 동향 출신 친구로 박태준은 다작한 윤복진의
수많은 동요시 등의 작품에 작곡한 명콤비였습니다. 박태준의 동요에는
"바닷가에서, 고향 하늘, 하모니카, 오빠생각, 오뚝이, 하얀밤, 맴맴" 등의
우리나라 동요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작곡하였으나, 이 가운데 윤복진의
작사에 곡을 붙인 50여 곡의 작품들은 윤복진의 월북관계로 1945년 이후
가사가 바뀌거나 또는 금지되기도 하였습니다.

  * 정률성(鄭律成,1914. 7. 7 ~1976. 12. 7)
중화인민공화국의 작곡가인 정률성은 본명이 정부은(鄭富恩)입니다.
1914년에 광주군 광주면 부동정 94번지 (현 동구 불로동 163번지)에서 태
어났습니다.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9년 전라북
도 전주시에 있는 신흥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33년에 중국 난징에 도착
하고 조선 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을 공부했습니다.

1936년에 그는 처녀작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작곡했습니다.
1939년에 중국 공산당의 가입과 동시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행진
곡)"과 중국의 인기 명곡 "연안송(延安頌)"을 작곡하였습니다.
1945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돌아 가서 조선인민군구락부 부장,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인민군 행진곡, 조선해방 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을 작곡했
습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당시, 중국 주은래(周恩來)총리의 요구로 김일성은
정률성을 중국으로 보내여 음악사업에 몸바쳐 오다 주은래의 수양딸로 외
교관이었던 정설송(丁雪松)과 결혼하고 이후,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습니다.
1976년 12월 7일에 베이징에서 사망하고 팔보산 혁명 공동묘지(八宝山革
命共同墓地)에 안장되었습니다.

  * 김순남(金順男, 1917~1986)
서울 출생. 1935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작곡을 전공하
였습니다. 1942년 귀국하여 ‘성연회’라는 지하서클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음악운동을 주도하고, 1945년 9월 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장 겸 중앙집행
위원을 역임하였습니다. 해방직후 조선음악건설본부를 결성, 일제잔재청
산과 진보적 민족음악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남로당에 가입하는 등 정치활
동을 하다가, 당시 북한 국가(國歌)의 대용으로 부른 "인민항쟁가"를 작곡
했다는 이유로 체포령이 내리자 1948년 월북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현대음악 작곡가로 알려졌으며, 작품집으로는 산유화(1947)
자장가(1948) 등이 있고, 기악곡으로는 교향곡· 피아노3중주· 현악4중주 등
이 있습니다. 작품의 경향은 현대적·정서적·민족적입니다. 또 양식면에서는
표현주의적·사실주의적인데 때로는 후기낭만주의적인 면도 보입니다.
그 동안 월북 음악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작품의 연주가 금지되었으나 1988
년 10월에 단행된 ‘월북음악가 작품해제조치’로 해금되었습니다.

  * 윤이상(尹伊桑,1917.9.17~1995.11.3)
작곡가 윤이상은 경남 산청에서 출생하여, 통영에서 성장하였습니다.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1935년 오사카(大阪)음악학교
에 입학, 1937년 귀국하였습니다. 통영여고 ·부산사범학교 교사를 역임하고
56년 프랑스로 가 파리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하였습니다. 59년 독일에서 열린
다름슈타트음악제 때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正樂) 색채를
담은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 유럽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
였습니다.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강제소환, 2년간
의 옥고를 치뤄야만 했으나, 세계음악계의 구명운동을 힘입어 풀려났습니다.

71년 독일에 귀화하고, 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에서의 <심청>
을 비롯, 옥중에서 작곡한 <나비의 꿈(6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하라(81)>,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칸타타 <나의 땅 나
의 민족이여(87)>,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신한 사람들의 넋을 추모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94)> 등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 또는 '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 범민족통일음악회 '의
산파(産婆) 역할도 하였습니다.

음악계의 일부 인사들은 윤이상은 우리나라의 음악가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의 작품과 예술은, 현대음악계에서 세계 5대 음악가로 손꼽혀지고 있는데
그가 독일로 귀화하였기에 독일음악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귀화는
이기적 동기나 자발적 모의에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 처지에서 강요된 선택
이었음을 감안하였을때 관용과 재평가의 여지가 있습니다.
정부가 그를 구속하고, 그후에도 입국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예우하
고 손을 내미는데 그곳에 체류하고 음악 예술활동을 펼쳤다 해서 백안시하는
것은 상황의 산물인 인간을 흠없는 완전한 신(격)으로 평하는 처사입니다.
그의 태생이 한국인이고, 그의 예술의 내용이 어김없이 한국적이라는 평가에
따르더라도, 윤이상은 한국의 음악가로 대접해야 합니다.
그의 월북 이전의 가곡작품에 "고풍의상, 추천, 달무리"가 유명합니다. 

  * 안성현(安聖鉉, 1920~2006)
안성현은 전남 나주에서 출생하여 가족이 함경도 함흥으로 이주한 후 곧
일본에 유학하여 성악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목포 항도중학교의 음악교사
가 되어 동료 국어교사 박기동 시인이 요절한 애제자의 죽음을 추모하고
죽은 누이를 애통하는 심정이 가미된 부용산 시에 곡이 붙어 절창이 되었
고 나중에는 여수-순천 반란사건의 잔여세력 빨치산들에게 널리 노래 되
면서 일명 빨치산의 노래로 불려지게 되어 당국의 금제를 받았습니다.

그는 동양의 불출세의 무희 최승희의 남편 안막(安漠)의 조카로서 1950
년 북한에 있는 아저씨에게 음악회 관계로 안막의 딸 안성희의 안내로 평
양에 다니러 갔다가 혼란기에 어쩔수 없이 그대로 눌러 앉게 되었습니다.
그가 작곡한 작품들에는 "엄마야 누나야, 부용산 외에도 낙엽, 진달래,
내 고향, 앞날의 꿈" 등을 작곡하였습니다.
 
  * 이서향(李曙鄕, 1915~ ?)
또 바우고개의 작사자는 누구일까요?
음악책들에는 작곡자 이흥렬이 작사까지 했다고 하는데
어느 음악강연회에서는 이호섭 작곡가의 형님인 극작가 서향(본명 李榮秀)
이라고 들었고. 그의 부인 백난영이 한사코 주장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1934년 일본 桑文社에서 발행된 이흥렬작곡집 I 은 물론 1939년 동
아일보에서 주최한 창작가곡발표회의 프로그램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서향과 이흥렬은 원산에서 태어난 고향 친구로서 1948년 이래로 그가 서울
아닌 고향 원산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지워졌지 않았나 싶습니다.

Comments

경주가곡 2019.02.03 20:11
곧 통일을 기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