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 백제의 실종

鄭宇東 0 1,983 2013.10.08 13:02
비류 백제의 실종
고구려의 동명성왕 高朱蒙에게는 세 왕자가 있었습니다.
고주몽은 첫째 부인 禮씨 부인과의 사이에 瑠璃왕자가 있었고
둘째 부인 召西奴 왕비 사이에 溫祚왕자가 있었고
또 소서노에게는 전 남편 優台와의 사이에 沸流가 있었습니다.

왕통을 이을 정윤이 온조에게 주어졌지만 유리왕자의 출현으로 고구려의
왕위가 유리에게 이어지자 위험을 느낀 온조와 소서노는 남쪽에 봉지로
가지고 있던 엄호국의 비류를 찾아 가다가 BC 18년경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으나 인근 낙랑군의 압박으로 선단으로 해상 탈출하여 하남 위례성
부근에서 나라를 세운 것이 溫祚백제이며, 이미 미추홀 부근에 있던 비류
의 엄호국을 沸流백제라 일컫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중국사서 수서 백제전과 주서 동이전 백제조에는 仇台를
시조로 하는 구태백제(仇台百濟)가 보이는데 나중에 온조백제와 비류백
제를 통합하였기에 일본에서 백제를 " くだら(久多良) 구다라 <=구태나라"
라 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는 설입니다.

이리하여 낙랑군의 압력으로 비류계 남부여족은 선단으로 해상탈출하여
한반도 서해안 지역 미추홀(현 인천)로 이주해 오는데 안정적인 정착을
원했던 온조계 해씨는 형 비류와 갈라진채 현 경기도 광주부근에서
溫祚十濟를 건국하고, 반면 비류계 진씨는 한반도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
하면서 목지국 등 토착 마한세력을 정복하고 AD 1C경까지 웅진(현 공주)
지역에서 비류백제를 완성시킵니다.

해상국가로서의 성격을 지닌 비류백제는 AD 2C를 전후로 하여 점차 왜열
도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먼저 큐우슈우지역을 정복하고 현지 담로국을
세워 통치하였고 점차 세토나이까이(瀬戸內海)를 거쳐 난파(나니와, 현
오오사카), 나라 등 근기지역까지 그 세력을 뻗치게 됩니다. 

한반도 남부와 왜열도까지 평정한 비류백제는 AD 3C중엽부터는 원거주지
였던 중국대륙의 산둥 반도 및 발해만 지역으로 재진출하기 시작하였고,
AD 4C초에는 고구려의 낙랑군 통합과 함께 대방지역을 흡수했을 뿐만 아
니라 남으로 양쯔강 유역에 진출하여 해상무역의 발판을 구축하고,
점차 AD 4C말경에는 옛 요서지역(현 난하서쪽)과 지금의 북경부근에 백제
군을 설치하여 그 세력권을 두게되자 황해를 백제내해로 하는 거대한 해상
세력 국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비류백제의 정체는 이처럼 중국에 거점을 둔 외백제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온조계 포함한 본백제,
일본 열도에 진출한 왜백제 등 크게 세 지역을 기본세력권으로 통치하면
서 해외 담로국을 갖춘 동방의 로마제국 같은 해상제국 국가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러면 왜 온조백제만을 인정하고
비류백제는 우리 역사에서 감쪽같이 실종되는 원인은 무엇일가 ?

첫째는 일본서기의 악의의 의도적 역사 왜곡입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에 의하면 AD 396년(병신년) 비류백제 응신(應神)
천황은 광개토대왕에 의해 격퇴당하자 해상탈출을 하여 당시 백제의 지배
권에 있었던 왜열도로 달아나 AD 400년경 나라지역에 망명 정부 (나라백제,
야마토 왜, 대화왜)를 수립하였습니다.

그 이후 수많은 백제유민들의 이주가 있었고 한반도의 온조 백제계와는 계속
해서 정치적 관계를 이루고 있었으나 AD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한반도의
백제세력이 몰락하고 백제 부흥군도 와해되자 AD 670년 천지 (天智)는 일본
이라는 국가로 명칭을 바꾸어 새나라를 건립하게 되었고,
뒤이어 AD 720년까지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한반도에서 건너온 백제, 가야
신라계 등 여러 세력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이들 고대 한국인들이 한반도에서
유입된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마치 일본이라는 나라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
손세력에 의해 독자적으로 건설되었다고 하는 의도적 역사왜곡의 희생으로
비류백제가 역사상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둘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의 온조백제 위주의 서술 때문입니다.
고려 인종때 김부식이 1145년 삼국사기를 편찬할 그 당시 왜국에 진출해 있
던 비류백제는 새로운 일본으로 개편된지 오래였고, 그는 신라출신이었고
또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정통으로 여긴 그의 역사관으로서는 신라보다 더
우위였던, 이제는 왜에서도 사라진 비류백제를 없애고 한반도에 머물러 있던
온조백제를 위주로 기술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일제 때 일본 사학자들의 황국사관에 의해 양성된 국내 친일역사가들
에 의한 무비판적 식민사관 수용과 교육선전 등으로 천박한 역사지식에 억매
여서 융성하던 비류백제는 우리의 역사에서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도 강성했던 비류백제의 영역이었
던 김해 가야 등지를 200여년간 경영하였다(南鮮經營說)는 궤변의 교묘한
아전인수식 원용에 지나지 않음을 바르게 인식하여야 합니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18세기에 비로소 시작되었는데도 4세기의 역사적 사실에
임나일본부설처럼 미래의 "日本"국호가 등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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