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 - -

鄭宇東 0 1,958 2013.04.14 01:41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 - -

일본의 중세 전국전란시대의 세 將軍이 등장하여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는 성정이 급하여 당장 베어 죽인다
[鳴かぬなら殺してしまえホトトギス時鳥]고 하였고
도요또미히데요시(豊臣秀吉)는 어떻게 하여서라도 울게
[鳴かぬなら鳴かしてみしょうホトトギス時鳥] 만들며
도꾸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는 새가 울때까지 기다린다
[鳴くまで待とうホトトギス時鳥 ]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직접 한 말은 아니고 어떤 문학천재가,
불같이 과격하여 꼼수를 쓰거나 기다리지 못하는 오다의 성격과
매사에 온갖 꾀를 내어 능수능란한 도요또미의 경륜과 처세와
은인자중 인내하여 종국적으로 일본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도꾸가와의
미덕을 참으로 절묘하게 비교하여 그려낸 이야기입니다.
(나 같으면 새야 울든 말든 자연스레 있게 가만 두라 하였을 것입니다.)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일본의 전국(戰國) ·아즈치시대[安土時代]의 무장(武將)으로서
오다노부히데의 둘째 아들로 16살에 부친의 뒤를 이어 오하리의 성주가
되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단절시켰고 전국전란의 시대에
무력으로 일본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의지를 일찍부터 표방하여 통일의 토
대를 마련하였으나 혼노사(本能寺)에서의 전투에서 패하여 자살했습니다.

도요또미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는
일본의 오하리(尾張)에서 미관말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표박생활 후
오다노부나가(織田信川)를 섬기고, 1568년 이래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오다를 따라 각지의 정전(征戰)에 참가하고 오다가 죽은 후, 그 계승자로
서 1585년 칸빠쿠(關白), 86년 다이죠(太政) 대신이 된 후, 90년 호죠 오
지마사(北條氏政) 토벌을 최후로 전국 통일을 완료했습니다.
1592년(선조 25) 명나라를 친다는 이유로 조선을 공격, 이른바 임진왜란
을 일으켰다가 1593년(선조 26) 심유경(沈惟敬)과 코니시(小西行長)간에
강화하고 군대를 철수하였으나 속은 것을 알고, 97년(선조 30) 다시 조선
에 침입, 병을 앓아 철병(撤兵)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습니다.

도꾸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는
일본의 무인으로 에도 막부(江戶幕府)를 개창한 초대 쇼군(將軍)입니다.
14세기 말 이래 계속된 일본 전국시대 말 오다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동
해지방 일대에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패권을 놓
고 도요또미와 대결을 벌여 패하기도 했으나 곧 그와 화친해 도요또미의
통일을 도왔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자신의 군대를 출병시키지 않음으로써
세력을 보존했고, 도요또미가 죽자 그의 지지 세력을 세키가와라(関ケ原)
전투에서 격파하고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1603년에는 정이대장군(征夷大
將軍)에 올라 에도에 막부를 개설하고 패자로서의 지위를 합법화했으며,
도요또미의 잔재세력을 무너뜨리고 일본통일을 완성했습니다. 권력을 확립
한 후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정책을 계승했으나, 군사력과
경제력을 충실히 하고 현실에 적절이 적응함으로써 일본의 봉건제 사회를
확립했습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어린 나이에 불모로 잡혀가는 미미한 변방 봉토의 주군
신분이었음에도 훗날 천하의 대권을 잡을수 있었던것은 가문의 원로들을 포
함한 가신들의 충성심과 그들 스스로가 창출해낸 가신그룹의 자긍심 덕분이
었습니다. 주군에 대한 충성을 다했던 도꾸가와의 가신들은 애초부터 가난하
고 힘없는 주군에게서 대권후의 후광효과를 기대하고 메달려 있었던 것은 아
니었습니다. 그들은 대권장악을 눈앞에 둔 전쟁에서도 서로 선봉장에 뽑히려
고 다투었습니다. 공을 다투려는 경쟁이 아니라 전사할 확률이 큰 선봉부대에
앞장섬으로서 자랑스럽게 죽겠다는 충성심의 경쟁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신 그룹들 중에는 이에야스가 대권을 잡은뒤 황궁 주변에서 영화를
누리는 대신 고향 미까와로 낙향 그 옛날 가난했던 미까와의 무사로 남으려한
가신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공신임을 빙자해 권력핵심 주변에서 벼슬 자리나
나눠 차지한채 그동안 별볼일 없던 주군을 따라다니며 겪은 고초와 가난을 한
꺼번에 벌충하려는 한심한 가신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러한 사리사
욕을 위해 주군을 속이거나 배신한 가신은 없었습니다. 그러한 가신의 충성스
런 기개와 미까와 무사의 정신이 도꾸까와 막부와 쇼오군시대를 삼백년 가까
이 지탱하게 했습니다.

훗날 도꾸가와이에야스는 다꾸앙(澤庵)대사를 통하여 불교에 귀의합니다.
다꾸앙 소오호오(澤庵宗彭, 1573~1645) 선사는 중국 선종의 정맥인 임계종
의 승려로서 도꾸가와의 귀의를 받고 동경 시나가와 부근에 東海寺를 개창했
는데, 이 절에 다니러 온 3代 將軍 이에미츠가, 대사가 만든 무짠지를 맛있어
하며 대사의 이름을 따라서 다꾸앙이라 하여 이후 일본 서민의 기호식품이
되었습니다. 또 澤庵대사는 검도와 다도에도 조예가 깊어서 그 방면에 일가
견을 펼친 저술이 있고 특히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승려라는 설이 있습니다.
옛날에 읽은 일본 검객소설 "미야모도 무사시"의 재미를 오랫만에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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