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뿔싸! 이사도라여!

鄭宇東 0 1,405 2013.02.03 20:20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1877~1927)

촉새들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문학 무용계에는
이사도라 던컨이 버나드 쇼에게 구애한 일화가 우스개로 전해집니다.
이사도라가 쇼를 만나서 "우리가 결혼하면, 나의 미모와 당신의 지성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겠지요." 하니 쇼가 "나의 외모와 당신의 지성이면 어쩌겠소?"
이 때 남자는 물론 미남이 아니고, 그런 질문을 하는 여자도 그리 물려받을
만한 지성의 소유자는 아닐 것입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런 일화에 그녀의
이름이 들먹여진다는 것은 그녀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을 시사해주는 면이 없
지 않습니다. 자유연애를 구가했던 이사도라, 자기 몸깔에 대해 자부심이 대
단했던 이사도라, 자신감과 정열로 넘쳤던 이사도라, 그 정도가 지나쳐 깊이
가 없고 어리석은 여인으로까지 비쳐졌습니다.

배 고픈 어린 시절

이사도라 던컨은 1877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닜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은행의 출납계원이면서 시를 썼고 어머니는 음악 선생이었
습니다. 그러나 시인 아버지는 노처녀와 사랑에 빠져 이사도라가 태어난 직
후에 어머니와 이혼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힘겨운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종교에 있어서나
인습에 있어서나 반항적인 태도를 심어 주었습니다. 거기다 타고난 예술가
기질까지 더하여, 아이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자라났습니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춤을 추었다는 이사도라는 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이
미 십대부터 동네 어린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쳐 생계를 꾸렸습니다.
춤으로 돈벌이를 해보려는 노력은 싸구려 뮤직홀에서 춤추는 일로 이어졌고,
그러다가 흥행사의 눈에 띄어 단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뉴욕의 무대에 오르
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식 발레가 아니라 음악이나 시에 맞추어 즉흥적
춤을 추는 소녀는 관객들에게 일시적인 흥미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영광과 갈채의 나날

유럽행을 결심한 것은 스물한 살 때였습니다. 거의 빈털터리나 다름없이 가
축운송선을 타고 런던에 도착한 그녀와 형제들은 우연한 도움으로 - 달밤에
춤을 추다가 정상의 여배우 캠벨의 눈에 전설적으로 띄어서 런던 사교계에
소개되었습니다. 이후로는 갈채의 나날이었습니다. 나무의 요정과도 같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사지를 드러내는 얇은 의상을 걸친 채 맨발로 자유롭게
걷고 달리고 뛰고 구르는 것만으로 내면의 정서를 표현하는 이 아름다운 무
용수는 런던, 파리, 베를린, 가는 곳에서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뮌헨에서는 학생들이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그녀의 마차에서 말을 떼어
버리고 자신들이 마차를 끌기까지 했습니다.

1903년에는 형제들과 함께 그리스에 가서 고대적인 풍광 가운데 자신을 풀
어놓고 일년 내내 마음껏 춤추며 지냈으며, 1904년에는 독일의 그루네발트
에 학교를 세우고 빈민층 소녀들을 가르치랴 재원 마련을 위해 순회 공연을
하랴 분주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야말로 꿈과 포부가 그대로 펼쳐지는 아
름다운 호시절이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춤에 대한 그녀의 생각도 무르익어 있었습니다. 파도나 바람
같은 자연 현상에서 영감을 얻은 유연한 동작으로 내적 감정을 표출하던 그
녀는 대영박물관에서 고대 그리스의 조각들을 보고 그 흐르는 듯한 인체의
곡선이야말로 항구적인 아름다움의 이상임을 확인했으며, 독일에서는 니체
의 사상에 깨우침을 받아 춤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가장 자유롭게 표현하
여 종교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고도의 예술임을 선언했습니다.

"무용수는 오랜 연구와 기도와 영감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육체가 영혼의
빛나는 표현임을 터득합니다. 그의 몸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악에 맞
추어 춤추면서 보다 심원한 세계로부터 오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게 됩니다.
이런 무용수야말로 진정 창조적인 무용수입니다. 자연을 본받되 모방하지
아니하고, 자기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동작으로 말하되 모든 자아보다 위
대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운의 여인

전통이나 관습에 반항적인 태도는 사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의
불행한 결혼을 보고서 이미 열두 살 때 독신을 맹세한 터였지만, 사랑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녀였습니다. 1906년에는 런던의 무대 디자이너 고든
크레이그에게서 첫 딸을 낳았으며, 1910년에는 미국의 부호 파리스 싱어에
게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는 그 두 아이가 유모와 함께 자
동차에 탄 채 세느 강에 익사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불행을 딛고 파리에 다시 학교를 열려던 계획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되자 미국으로 돌아갔던 그녀는 세번째 아이를 사산했고, 종전 후 남아
메리카,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순회공연을 계속했지만 이전 만한 성공은
거두지 못했습니다. 1920년에는 모스크바 무용학교 설립을 위촉 받아 러시
아에 갔다가 17세나 연하인 천재 시인 예세닌(세르게이. A. 1895~1925)을
만나 결혼했으나, 당시 반공산주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미국에서 두 사람
은 '볼셰비키'로 낙인 찍혀 다시금 방랑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유럽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예세닌은 혼자 러시아로 돌아가 1925년 자살했습니다.

극적인 죽음

사랑하는 자녀들의 죽음, 사산, 예술가로서의 좌절, 불행한 결혼 생활, 남편
의 자살로 그녀의 말년은 비운으로 얼룩졌습니다. 그리고 그 화려하고도 파
란 많은 생애는 극적인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남불의 휴양지 리비
에라 해안의 니스에서 그녀를 숭배하는 젊은 청년이 스포츠카를 가지고 와서
드라이브를 권했는데 다소 차가운 날씨였으므로, 그녀는 쇼올을 둘렀습니다.
가장자리에 달린 술 장식의 길이만 45센티나 되는 길고 붉은 비단 쇼올이었
습니다. 차가 출발하는 순간, 술이 바퀴에 말려들어갔고, 그녀는 목이 졸려
즉사했습니다.

"한 발은 록키 산맥의 정상에 딛고 양 손으로는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를 품
어 안은 채, 머리로는 하늘을 이고 그 이마에 무수한 별들의 왕관을 쓴" 우주
적인 무용수가 되기를 원했던 여성은 길지 않은 생애를 이렇게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온 몸으로 보여준 모범을 통해 무용은 음악이나 미술, 시와 나
란히 정상의 예술로서 자리잡게 되었으며, 그녀가 모색한 이른바 "미래의 무
용"은 오늘날 현대 무용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그림자는 실제로 무용
의 하늘에 우주적인 위용으로 그렇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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