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 金堉 대감의 白紙서한

鄭宇東 0 1,438 2012.10.11 12:15
대동법 金堉 대감의 白紙서한
청풍 김씨에 호가 잠곡인 김육(金堉)은 대동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일상생
활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현지의 현물로 바치던 세공을 금전이나 포목으로
통일한 대동법을 창안 실시하여 납부하게 한것이 그의 제일 큰 업적으로 꼽
히고, 백성의 실생활을 중시하여 절실한 민생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열의와
태도는 실용실학의 실마리를 풀어 학문에도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선구자
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늦게 둔 재찬(載瓚)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또
한 훗날 약현(藥峴) 대감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인입니다.

조선조 후기에 이창운(李昌運)이란 장군이 있었습니다.
우리 조선시대의 특이한 제도로 장군이 되면 조정의 문무백관중 아무나 지명
하여 그의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그의 업무를 보좌하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제도는 문벌이나 학파에 얽매이고 농락되어 인사의 고질병이 만연
하였던 조선 봉건사회에 숨통을 틔워주는 한가닥 청량한 바람이 되어 준 참으
로 갸륵한 고안으로 선인들은 이를 기벽(嗜碧)제도라 하였습니다.
이런 계제에 조정의 신진기예로 이름을 날리던 김육대감의 아들 김재찬이 지
명되니 아닌게 아니라 김재찬은 콧방귀를 뀌며 "제까짓게 나를 데려다 수하로
부리겠다"고 하며 반발의 기세가 등등하였습니다. 문관과 무관이 다 같이 양
반이지만 그 당시만 하여도 무관은 홀대받고 문관은 득의연하던 때라 그렇다
하여도 나라의 법이 지엄한데 ---- 그의 도가 지나쳤습니다.

이 장군이 법의 권위를 앞세워 군률에 불복종한 죄를 물어 감영에 잡아들이게
하였습니다. 이때사 발등에 불이 떨어져 다급하니 아버지께 애걸복걸 편지를
써 받아서 몸에 지니고 가니 벌써 좌기형구를 널어 놓고 서슬이 시퍼렀습니다.
부친의 편지에 한가닥 희망을 걸었으나 장군은 그 말을 들으려하지도 않고 그
어른이 그런 구차한 편지를 쓸 어른이 아니라고 우기는데 주위 사람들의 권유
로 마지 못해 편지를 펼쳐보니 아무 글도 쓰이지 않은 백지 편지였습니다.
이 장군이 편지를 보고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 그 어른 편지 한번 미상불 잘
쓰셨네. 자식을 똑똑히 못 가르쳐 할 말이 없으시다는 거여"

그리하여 죽음은 면하였으나, 옥에 내려 가두고 자물쇠를 채워버렸습니다.
그날 저녁으로 장군은 감옥으로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밤이 이슥하도
록 평안도의 지리와 물산 교통로와 군비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후 매일 저녁
찾아와서는 복습과 학습을 거듭하여 김재찬은 40여일 만에 평안도의 실정을
그 고장을 다스리는 사람보다도 더 소상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지독한 밀봉교육이 끝나는 날, 장군은 김재찬의 손을 잡고 조정의 차별대
우에 불평이 쌓일대로 쌓인 많은 서북사람의 민란에 자신을 대신하여 대비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장군이 죽고 김재찬이 정승에 올랐을때
인왕산의 밤의 봉화대와 낮의 봉수대가 일세의 풍운아 홍경래의 급변을 알렸
을 때 민가에서는 서로 다투어 피난길에 나서는 판에, 화급한 전갈에 여유만
만히 행차하여 늦게 조정에 당도하니 질타하는 무리들에게, 행차중에도 민심
을 진정시키는 일을 하면서 오느라 늦었다고 변명하였고 조정에 다달아서는
사태수습을 일사천리로 처결해 내니 며칠이 안가서 난리도 평정되었습니다.
정승 김재찬의 집이 요즘의 중림동 부근이어서 당시의 지명을 따라서 약현 대
감으로 불리며,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도 부근에 있어서 약현성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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