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착(穿鑿)과 호도(糊塗)

鄭宇東 0 1,704 2012.09.25 14:01
천착(穿鑿)과 호도(糊塗)
사물의 명칭이 붙여지는 경위 및 경로를 살펴보면
원뜻을 벗어나 엉뚱하게도 견강부회(牽强附會)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착(穿鑿)이라는 말도 구멍을 뚫는다는 원뜻에서 벗어나 필요없는 부분까지
깊이 파고 탐구하여 억지로 현학적으로 견강부회 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러한 유사 현상에는 명확히 결말을 내지 않고 우물쭈물하여 덮어 버리는
호도의 경우도 그러 합니다. 언뜻 생각나는 사례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말들이
떠 오릅니다.

* 천고마비(天高馬肥) *
은(殷)나라 때부터 중국 북방에 나타나기 시작한 흉노족(匈奴族)은 거의 2천
년 동안 중국의 각 왕조나 백성들에게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척박한
초원을 생활 근거지로 하여 유목 생활을 하는 그들의 가장 강점은 가을에 살찐
말을 이용한 말에 의한 기동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병(騎兵)이 강했고,
그 기동력을 십분 발휘해 바람같이 국경을 넘어 들어와 중국 북변 일대를 휘저
으며 약탈을 자행하고는 다시 바람처럼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군왕들은 흉노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외치
(外治)의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제 왕조는 각각 북쪽 변경에다 장성을 쌓았고,
천하통일을 이룩한 이후 시황제(始皇帝)는 그 장성을 증축하고 연결하여 만리
장성(萬里長城)을 완성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만리장성도 흉노의 침
입을 막기에는 별로 소용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길기 때문에 관리와 활용의 측
면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또한 척박한 초원에서 방목과 수렵을 하는 것이 생활 방편의 전부인 그들에게
초원이 온통 얼어붙는 겨울은 두렵고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니 그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위한 식량 조달은 보다 따뜻한 농경 생활을 하고 있는
중국인들에 대한 약탈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중국
인들의 처지에서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수 없었고, 흉노는 귀신보다 무서
운 존재였습니다. 이리하여 북방 흉노족의 침입에 대한 경계심과 무서움을 가
르킨 이 말은 차츰 가을의 풍성함과 맑은 하늘의 시절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 고산류수(高山流水) *
유백아(兪伯牙)는 춘추때의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추석날 밤에 강가에 이르러 거문고를 타다가 종자기(種子期)라고 하는 나
무군이 그가 타는 거문고소리를 엿듣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타는 가락을 알아들을 만하오?"
"알아 듣지요."
유백아가 한가락을 타자 나무군은
"높고 크거니 높은 산에 그 의미가 있구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유백아는 또 한가락을 뜯었다. 나무군은
"기세 차거니 흐르는 물에 그 뜻이 있구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유백아는 머리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습니다.
그가 음악에서 표달한 의미가 바로 "높은 산, 흐르는 물"이였던 것입니다.
유백아는 "지음"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것만 같이 느껴져 나무군에게
인사를 차렸습니다.
이와 같이 산이 높고 물은 도도히 흐른다는 문자축자적 문학적인 용어에서
하늘을 찌르는 산의 기상과 강의 도도한 유장미를 언급한 예술적으로 승화
된 용어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知音之己의 별칭입니다.

* 빅 벤(Big Ben) *
영국의 수도 런던을 상징하는 빅벤은 원래 탑도 시계도 아니며 런던의 웨스
트민스터 궁전 북쪽 끝에 있는 시계탑에 딸린 큰 종(鐘)에 대한 별칭압니다.
무게가 13톤에 달 하는 이종은 제작 당시 공사 책임을 맡고 있던 벤자민 홀
경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른 것인데 흔히 종뿐만아니라 지금은 시계탑 자
체도 빅 벤이라고 부릅니다. 시계탑의 4면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자명종 시
계가 달려 있고, 시계탑 자체도 독립되어 세워진 것들 가운데 세 번째로 높
습니다. 2009년 5월 31일 건립 15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가 시계탑에서 있
었습니다. 1858년에 세워진 빅 벤은 많은 영화에서 런던을 상징하는 장소로
등장하였습니다. 201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여 빅벤은
엘리자베스 타워로 개명되었습니다.

* 아라비아 숫자(Arabic Numerals) *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상용 숫자)는 사실은 인도에서
발명된 것입니다. 즉 1, 2, 3, 4, 5, 6, 7, 8, 9의 아홉 개의 숫자와 0이란 기
호는 1400∼1500년 전에 인도에서 발명되었습니다. 인도에서 발명된 숫자
는 곧 아라비아로 전해졌으며 인도의 수학교과서는 아라비아어로 번역된 후
북아프리카와 에스파냐를 통하여 유럽으로 전해져 처음에는 라틴어로 번역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라비아에서 건너온 숫자라는 뜻으로 유럽 사람들은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르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한다면 인도(-아라비아) 숫
자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피사노(L. Pisano) 등에 의하여 개량되
어 15세기 말기에 이르러 지금의 모양으로 고정되었습니다.

* 십자군(Crusades) *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
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
행한 원정에 참여한 군사를 십자군이라고 부릅니다. 1차 십자군은 로마의 교황
우르바누스 II세의 축복을 받아 출정했고 당시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대를 십자군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
다. 십자군에게서 종교적 요인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교도와 이
슬람교도와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
이라고 성격지을 수는 없습니다. 봉건영주, 특히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
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
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습니다.
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 ·모험심 ·약탈욕구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적 광분과
합쳐져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 ·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聖化)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된 것입
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성전의 대의명분으로 시작된 십자군전쟁은 세속적 욕
심이 끼어들어 그 어느 전쟁보다도 잔인-잔혹하고 검은 탐욕으로 얼룩진 전쟁
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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