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 서백당

鄭宇東 0 1,627 2012.09.11 18:10
경주 양동 서백당

경주의 양동마을의 서백당(書百堂)은 경주 손씨의 대종택으로, 안골 중심
높지막한 산 중턱에 있습니다. 이 집은 양민공(襄民公) 손소(孫昭, 1433~
1484)가 만호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마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자리
를 잡은 곳이어서 그 유서가 깊습니다.

본채 앞쪽 오른쪽 모퉁이에 사랑채가 있고, 이곳에 '서백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참을 인(忍)자 백 번을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구당서(舊唐書)>의 '효우(孝友)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습니다.

운주사람 장공예는 9대가 한집에 화목하게 살았습니다. 고종이 태산에 가는
길에 직접 그의 집에 들러서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지필묵을 청
해서 참을 인(忍)자 백 자를 써서 바쳤습니다. 그래서 이 집의 당호가 '서백당
(書百堂)'이 되었습니다. 애초에는 서백(書百)이 아닌 서인백(書忍百) 이었다
고 합니다. 그리고 마루 안쪽에 걸린 또 다른 현판에 쓰인 글자처럼 '송첨'(松
簷)이라고도 합니다. 이 집에서 외손으로 회재 李彦迪이 태어난 것처럼 외손
이 성할 터라하여 시집간 딸들은 종택이 아닌 곳에서 해산하도록 했습니다.

또 하나 같은 뜻의 백인당(百忍堂)은
경북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에 위치하며 정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
으 로 경산이씨(京山李氏) 대종재(大宗齋)로서 학가재(學稼齋) 이주, 사월정
(沙月亭) 이륜(李綸)이 선조인 소부윤(少府尹) 이감과 양양부사 이번(李蕃),
대사헌(大司憲) 이흥문(李興文)을 추모하여 1661년에 건립하고,"忍之爲德,
耐以爲仁" 이라는 성현(聖賢)의 말씀을 본받아 종친의 화목(和睦)을 위하여
재호(齋號)를 백인당이라 호칭하였으며 마을의 이름도 재실의 이름을 따서
자연히 백인마을이라 불립니다.

구미시에 또 다른 백인당(百忍堂)이 하나 더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봉곡 박수홍(朴守弘 1588∼1644)과 그의 아들 박진환(朴震
煥) 을 기리는 재실(齋室)로,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입니다. 박수홍이 태어나
고, 그 후손들이 세거해 온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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