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3대 樂聖

鄭宇東 0 1,990 2012.07.25 06:05
우리나라의 3대 樂聖
서양음악에서는 루드비히 판 베토벤을 악성이라 하며
요안 세바스티안 바하를 음악의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
프란쯔 페터 슈베르트를 가곡의 왕으로 호칭하며 칭송합니다.
우리나라의 3대 악성(樂聖)은
진의 칠현금(七絃琴)을 개량하여 거문고(玄琴)을 만든 고구려의 왕산악과
대가야국 가실임금을 위하여 12줄 가야금을 만든 가야출신의 신라인 우륵과
조선조 세종때 미비한 궁중음악등 우리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비한 박연입니다.


왕산악(王山岳)은
고구려 말기의 정치가로 거문고를 제작하였으며 또한 거문고 연주의 대가입니
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따르면, 진(晉)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이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지만, 연주
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이에 나라에서는 칠현금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을 구하였
는데, 당시 제이상(第二相)으로 있던 왕산악이 칠현금을 개량하여 새로운 악기
를 만들고 100여 곡을 지어 연주하였습니다. 이때, 현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으
므로 이 악기를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고, 이후에는 거문고(玄琴)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원래 거문고는 중국 악부의 금(琴)을 본받아 만들었는데
그 길이가 3자 6치 6푼인 것은 1년이 366일인 것을 상징한 것이고
그 너비가 6치인 것은 상천 하지 동서남북 사방의 6합을 상징합니다.
아래가 네모지고 위가 둥근 것은 천원(天圓) 지방(地方)을 본받은 것이고
원래의 다섯줄은 오행을 본받은 것이었으나 뒤에 큰 줄(임금)과 작은 줄
(신하)을 추가하여 북두칠성을 상징하였습니다. 현재는 여섯줄입니다.

 
우륵(于勒)은
본시 대가야국(大伽倻國) 사람으로 가실왕(嘉實王)의 총애를 받았으며, 왕의
뜻을 받들어 12현금(絃琴:가야금)을 만들고 이 악기의 연주곡으로 12곡을 지
었습니다. 갸야국이 멸망하자 신라에 투항, 제자 이문(尼文:泥文)과 함께 낭성
(娘城)에 살다가 진흥왕에게 알려져 하림궁(河臨宮)에서 이문과 함께 새 곡을
지어 연주, 이에 감동한 진흥왕의 배려로 국원(國原:忠州)에서 살게 되고,
대내마(大奈麻) 계고(階古)와 법지(法知) 그리고 대사(大舍) 만덕(萬德) 등
세 사람을 보내어 그의 음악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우륵은 이 세 사람의 재주를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얏고,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습니다. 그 후 이들은 우륵이 만든 12곡을 듣고
“이 곡들은 번잡하고 음란하여(繁且淫) 우아하고 바르지 못하다.” 고 하며
5곡으로 줄여 버렸습니다. 우륵이 이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매우 노하였으나
새로 줄인 5곡을 모두 듣고 난 뒤에는 눈물을 흘리며, “즐거우면서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우아하고 곧바르다(樂而不流[淫]
哀而不悲[傷]) 하겠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가야금도 중국 악부의 쟁(箏)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가야금의 외관은 가야인의 천문관과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가야금의 모양에서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天圓)하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地方)한다고 합니다.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六合)
을 본받고 열두 개의 줄은 1년 4계절 12개월을. 기둥의 높이가 3치인 것은
天 地 人 삼재(三才)를 상징하였습니다.
옛날 우륵이 가야금을 치던 지금의 충주 대문산 기슭의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강가의 절벽 위를 사람들은 탄금대라고 불렀습니다. 또 훗날 임
진왜란때 신립장군이 나라를 위하여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중과부적으
로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합니다.


박연(朴堧, 1378.8.20~1458.3.23)은
조선 전기의 문신·음률가(音律家)로 본관은 밀양(密陽)입니다.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문헌(文獻), 초명은 연(然)이며
영동(永同) 출생입니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校理)
를 거쳐 지평(持平)·문학(文學)을 역임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후 자신의 음악
적 재능을 알아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훌륭한 임금 세종을 만난 덕에
역사 속에 묻혀간 흔한 고위관료에 머물지 않고 조선의 음악을 정리 정돈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
을 얻고, 1427년(세종 9) 편경(編磬) 12장을 만들고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 음률의 정확을 기하였습니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鄕樂)
을 폐하고 아악(雅樂)으로 대체하게 하여 궁중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습
니다. 144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중추
원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습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아들 계우(季愚)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삼조(三朝)에
걸친 원로라 하여 파직에 그쳐 낙향하였습니다. 특히 저(大笒)를 잘 불었고
고구려의 王山岳, 신라의 于勒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되고 있
습니다.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되고, 지금도 고향 영동에서는 해
마다 '난계음악제'가 열려 민족음악 발전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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