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없는 20대. 영혼 없는 30대

鄭宇東 0 1,619 2012.07.06 06:31
심장 없는 20대. 영혼 없는 30대

[서양의 정치속담에
20대에 사회주의에 매료되지 않은 사람은 심장이 없는 사람이지만
30대에도 사회주의에 빠진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한창 이상과 정의에 더운 피를 끓이는 청년시절에 사회적 부조리로 인하여
빈부의 격차로 고생하는 무산대중에 동정을 느끼고 공유재산과 계급없는
평등사회를 건설하려는 이상에 불타지 않을 청년은 많지 않습니다.
나이를 더 먹고 철이 들어감에 따라 젊은 한때의 이상이었던 사회주의의 꿈
도 현실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
의 붕괴에서 익히 보았으며 또 개인적으로도 세계적 지성인 앙드레 지드나
장 뽈 사르트르가 공산주의자에서 다시 재전향 복귀해 온 사례를 봅니다.
아래에 공산주의에 대한 네이버백과사전의 해설 전문을 길게 인용합니다.]

공산주의를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말하면
사유재산제도의 부정과 공유재산제도의 실현으로 빈부의 차를 없애고 평등사회
를 이루려는 사상입니다. '코뮤니즘(communism)'은 본래 공유재산을 뜻하는
'코뮤네(commune)'라는 라틴어의 조어(造語)로서, 사유재산제를 철폐하고 사회
의 모든 구성원이 재산을 공동소유하는 사회제도를 의미하였습니다. 사유재산제
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타락과 도덕적 부정을 간파하고, 재산의 공동소유를 기초
로 하여 더 합리적이고 정의롭고 평등한 공동사회를 실현하고자 한 공산주의의
이상은 인간의 정치적·사회적 사색이 시작된 때부터 싹튼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원은 멀리 고대 유대인들의 에세네파교도(Essenes), 플라톤의 <이상국가론>,
원시 그리스도교의 교리, 중세 말 T.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 근세 초 T. 캄
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Civitassolis>(1623) 등에까지 소급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공산주의라고 할 때는 문헌에만 남아 있는 죽은 공산주의가 아니
라,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
를 가리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840년대 이후 서유럽에서 K. 마르크스와
F. 엥겔스에 의하여 창시된 마르크스주의를, 레닌이 20세기 초 러시아의 특수한
조건하에서 발전시킨 사상 및 이론의 체계와 실천운동으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즉 공산당(共産黨)이 수립한 과거 소련·동유럽·중국대륙·북한·인도차이나
반도 등지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産業革命)의 여파가 유럽의 정치와 사회
에 격심한 파동을 일으킨 격동의 시대 산물이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은 자유·평등·
박애의 3대 이념(理念)을 목표로 내세운 민주주의혁명으로, 불멸의 역사적 의의
를 지닙니다. 프랑스혁명은 반(半)봉건적 전제군주제를 전복하고 시민적 자유와
인권을 천명하는 데는 일단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천명한 자유와 인권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도화되지 못하고, 우여
곡절을 거친 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제정(帝政)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더욱
이 평등의 이념은 법률 앞의 평등에 그쳤을 뿐, 사회의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였으며, 실현할 수 있는 조건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은 재산권의 신성을 선언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되고 있습니
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은 서유럽의 의식과 양심 속에 인간평등의 관념을 심어 놓
았으며, 이것은 그 후에 일어난 각종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운동에 정신적 기
반을 제공하였습니다.

F. 바뵈프, A. 블랑퀴, W. 바이틀링 등 혁명적 공산주의자와 C.H. 생시몽, C. 푸리
에, R. 오언 등 비폭력적인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프랑스혁명의 평등사상
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프랑스혁명의 자유
와 평등이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자기들의 조국 독일에 비하면 프랑스
는 사상적으로 멀리 앞선 선진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청년 마르크스는 반봉건적
절대주의국가인 독일에서 프랑스식 민주혁명을 수행하는 것을 실천적 과제로 삼
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자본가계급)가 취약하고 무력하였던 독일의 상황에서, 부르
주아지가 혁명의 주체는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대신 프롤레타리아트(근대
노동계급)를 혁명의 주체로 간주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독일의 해방은 단순한
정치적 해방(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인간적 해방만이
독일의 완전한 해방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 이 인간적 해방을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계급은 바로 '인간성의 완전한 상실태(喪失態)요, 그러므로 인간성의 완
전한 회복에 의해서만 자기를 회복할 수 있게 되는 한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
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은 1840년대의 전반기에 형성된 것인데,
여기에서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F.헤겔의 변증법적(辨證法的) 철학과
L.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唯物論的) 인간주의 사상이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인간
적 해방이란 공산주의 혁명을 통한 모든 인간의 자기소외(自己疎外)의 극복과 계
급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사유재산이란 인간의 노동이
 대상화(對象化)된 것, 즉 객관적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노동의 산물이 사유재산이 되면서, 거꾸로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
(노동자)을 지배하는 현상을 그는 인간의 자기소외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었
습니다. 요컨대 그에게서 공산주의란, 단순한 재산의 공동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한 인간소외의 극복, 인간성(인간의 본질)의 적극적인 회복을 의미하였
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프랑스혁명의 자극에 의하여 촉발
되었지만, 동시에 헤겔과 포이어바흐 철학의 주제였던 소외의 개념을 핵심(核心)
으로 하여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철학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이
것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였습니다. 그는 1845∼46년 엥겔스와 더불어 <독일 이
데올로기 Deutsche Ideologie>를 집필, 여기서 사회의 물질적 생산관계와 생산
력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임을 구명하고 이데올로기나 정치는 물질적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적(史的) 유물론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에 의하여 그들
은 헤겔에서 파생된 독일의 각종 관념론(觀念論)과 포이어바흐의 사회의식 없는
유물론적 휴머니즘을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관으로 옮아갔습니다.

물론 이들은 인간과 인간의 의식을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추상적인 인간
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적 존재'로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새로운 유물
론은 자기들에 선행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나 기계적(機械的) 유물론을 극
복한 사회적 유물론이었습니다. 사적 유물론의 성립으로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
주의 이론은 그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사적 유물론에 의하면 인간은 생산
을 중심으로 서로 일정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데, 한 시대의 생산관계는 그 시대의
생산력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생산력과 그에 따른 생산관계라는 경제
적 요인은 사회의 토대이며, 정치제도·법률·사상·종교·문화 등은 이 경제적 토대
위에 구축된 상부구조(上部構造)입니다.

따라서 토대가 바뀔 때는 이에 걸맞도록 상부구조도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산력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능,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하여 발전
합니다. 그 때는 새로운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에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생겨나고 이 모순은 계급관계로 이전됩니다. 다시 말하면 낡은 생산관계의 유지
에서 이득을 보는 유산계급(지배계급)과,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설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무산계급(피지배계급) 간에는 투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종래의 생산
관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어 내려는 사회혁명이 피지배계급측에
의하여 일어나, 마침내 새로운 생산관계(경제제도)가 창설되고, 이에 따라 정치
제도를 비롯한 상부구조도 바뀐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엥겔스는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에 나타난 원시 공산주의사회 ·고대 노예
사회 ·중세 봉건사회 ·근대 자본주의사회 등 여러 사회제도의 출현과 붕괴를, 생산
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사회발전의 법칙에 의거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도 이 법칙에 따라 붕괴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
적 유물론은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경제적 요인을 중요시하는 데 그치는 일반적인
경제사관(經濟史觀)과는 구별됩니다. 사적 유물론의 핵심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생
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유발하고 프롤레타리아 혁
명의 승리에 의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파괴되며, 마침내 생산수단의 공유를
기초로 하는 공산주의사회에 도달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적 유물론은 이와 같이
일종의 계급투쟁사관(階級鬪爭史觀)입니다.

마르크스-엥겔스가 계급투쟁사관을 더 간명하게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은 1848년
2월혁명 직후에 발표한 <공산당선언(共産黨宣言)>에서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자본주의사회가 출현하기까지의 유럽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인류의 역사에서 수행한 진보적 역할을 높이
찬양하였습니다. 동시에 부르주아지가 이룩한 자본주의사회도 그 내재적 모순으
로 발생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혁명에 의하여 붕괴한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자본주의사회가 왜 붕괴하지 않을 수 없는지에 관한 경제학
적 이론을 자세히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마르
크스가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이 <자본론(資本論)>입니다. 여기에서 그의 소외론
(疎外論)은 계승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2월혁명이 좌절된 후 영국으로 망명,
경제학 연구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영국 고전경제학의 여러 범주(範疇)를 비판
하는 한편, 그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을 기초로 잉여가치(剩餘價値)의 이론을
도출하였습니다. 거기에 따르면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소유
하고 있는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고 그 대가를 임금으로 받
아서 생활합니다.

그런데 노동자는 약자의 입장에 있으므로 자기의 노동력을 재생산(再生産)하는
데 필요한 시간 이상의 노동을 합니다. 이 지불받지 못하는 잉여노동시간에 창조
한 가치, 즉 잉여가치는 당연히 노동자에게 돌아와야 하는데도 자본가의 수중으
로 들어가 이윤이 됩니다. 이윤은 곧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결과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유경쟁하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하지 않고서는
경쟁에 이길 수도, 살아 남을 수도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발전법칙입니다.

여기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는 이해의 근본적인 대립으로 계급투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숫적으로 점점 늘어나고 계급의식으로 단결된 프롤레
타리아트는 혁명을 일으켜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을 타도하고 자신의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여, 그 힘으로 부르주아지가 사유하였던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의
공유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을 전면적으로 전개한 것이 1867년에 출
간된 <자본론> 제1권입니다.

마르크스는 그의 생전에 <자본론> 제2권과 제3권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
만, 엥겔스가 그의 원고를 정리하여 뒤에 출판하습니였다. 엥겔스는 사적 유물론
과 잉여가치론으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고 자부하였으며,
70년대부터는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하고, 생시몽, 푸리에, 오언
등의 선구적인 사회주의에는 과학적 이론이 없다고 하여 '공상적 사회주의'라 불
렀습니다.

19세기 중엽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말은 엄밀한 구별 없이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 마르크스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와
구별하기 위하여 '공산주의'라고 하였다. 그는 1875년 <고타 강령(綱領) 비판>
에서 계급 없는 공산주의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공산주의를 '보다
낮은 단계'와 '보다 높은 단계'의 2단계로 구별하였습니다. 제1단계는 아직 초보
적 단계로서 여기에서는 완전한 분배상의 평등은 실현될 수 없으며, '개인은 능
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제1단계는 완전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로서 계급적 독재, 즉 '프롤레타
리아트의 혁명적 독재'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레닌은 이 공산주의의 제1단계를 '사회주의'라고 규정하였고, 따라서 프롤레타
리아트 혁명에 의하여 수립되는 '사회주의' 정권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
재정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레닌 이래로 공산주의자들
은 마르크스주의를 강령으로 하지 않는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거
부하는 사회주의는 결코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그리하
여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라는 용어도 공산주의자와 비공산
주의자 사이에서는 전혀 별개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공산주의의 제2단계, 즉 '보다 높은 단계'는 생산력의 높은
발전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개인이 분업(分業)에 노예처럼 예속되는
상태가 소멸되며, 따라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가 없어지고, 노동이 단지
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생활의 '제일의 욕구(欲求)'로 되고, '개인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낭만적인 공산주의의 미래상은
20세기를 관류(貫流)한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주국인 소련이 시장경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급기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改革)과 글라스노스트(開放)을 선언하고]
연방을 해체하였으며, 이어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몰락한 90년대 초까지 그대로
잔존한 공산국가들의 절박한 현실을 볼 때, 이른바 과학적 공산주의가 꿈꾸었던
그러한 미래는 도저히 도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자본주의
는 1840년대의 초기 자본주의의 추악한 면미 많이 정화되고 부정과 부패의 구조
적 폐단을 많이 척결하여 과격한 공산혁명이 일어날 소지를 사전에 차단할 여러
장치들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출처] 공산주의 [共産主義, communism ] // 네이버 백과사전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