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못 아는 임진왜란

鄭宇東 0 1,764 2012.01.21 12:50
(내가) 잘못 아는 임진왜란

 
올해는 壬辰년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로부터 42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너무 피해가 많아 꼭 진 전쟁으로만 알고 기를
펴지 못해 오다가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창피한 생각을 말끔히 떨어버립니다
만 전란의 피해로 조선8도의 자원과 인심이 황폐화하는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새로운 화력이 좋은 무기 조충과 밀집대형의 창으로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일본
의 육군세와 반대로 허술하고 약세인 일본수군을 이순신장군이 거느린 조선수군
이 여지없이 쳐부수고 자랑스럽게 연전연승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조선 수군의 승리와 경향 각지에 벌떼같이 일어난 의군의 봉기가 일본
의 수륙협공작전을 막음으로써 정유년의 재침입에도 불구하고, 곧 이어진 도요또
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총퇴각하고 7년간의 전쟁을 우리 조선의 승리
로 마감하게 된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철갑선은 아니라도 갑판에 송곳과 칼을 꽂은 거북선과 기동력이 뛰어난 판옥선
의 우수성과 대포등 화력의 우세를 이용한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신묘한 전술과
원균의 육전에서의 졸전이 너무 극명하게 당시의 사서인 선조실록 및 그 수정
실록과 난중잡록, 징비록등의 작품에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일부 원균의 억울함
을 강변하는 무리가 임란 당시보다 150년이 지나서 원균의 자손들이 의뢰하고
그들이 제공한 자료를 이용하여 김간이 저술한 원균행장록을 유일한 근거로 하
여 사실무근한 궤변을 농간하는 소설가들이 득세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반면에
세계의 사관학교들에서는 세계해전사 중 명량대첩등의 이순신장군의 승리를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넬슨제독의 승리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조선 조정의 원군요청에 조승훈등 소규모의 원군을 신속히 파병하고 이어서
이여송의 대군을 압록강을 건너 파병시킨 명군의 역할은 선조임금의 말처럼
임란극복의 주역을 담당하였다는 말은 일종의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으며
명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하하다 벽제관에서 대패한 후 더 싸우기를 꺼린것
은 이 전쟁을 우리 조선영역에 한정시키고 중국대륙으로의 확전을 막는데에다
그들의 파병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심유경을 내세워 종전회담을 추진하고 전쟁
에 소극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전쟁의 긴세월 동안 우리 백셩들은 명
군의 횡포에 시달렸고, 조정은 조정대로 명나라 사신들의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임란전 파견한 일본사신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상반된 귀국보고서는
당파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된 국정의 난맥상을 보이고 일본군의 침략에 대한
초기 대응에 속수무책하여 연전연패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사 김성일의 책임은 변명의 여지가 없으나 국정을 두루 맡은 위정자의 책임
에 귀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에 논의가 많았던 예술가들의 친일행위에 대한 문제에서도
친일파의 원조와 그 역사는 일제 강점기에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편
에 서서 매국 행위를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반역자 국경인(鞠景仁)은 원래 전
주에 살다가 큰 죄를 짓고 함경도 북쪽 끝인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어 나중에
회령 관아의 아전이 되었으나, 임진왜란이 터지고 선조의 두 왕자인 임해군
(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함경도로 도망쳐 오자, 그는 경성의 아전인 숙부
국세필(鞠世弼)과 명천의 노비 정말수(鄭末守) 및 기타 불량배들을 규합해 백
성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켜 왕자들을 붙잡아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주고 벼슬을 받었으나 그 말로는 비참하였습니다.

또 전쟁이 나자 자진하여 왜군의 길잡이가 되어 단걸음에 한양까지 간 공휘겸
은 의병장 천강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의 징치로 불의의 객이 되었고
또 정유재란때 황석산성 전투에서 김필동이 북문을 빠져나가 왜군을 불러들여
성이 함락되고 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피해를 입히었습니다.
 
그런 한편으론 일본인 沙也可(=>김충선)가 귀화해 온 사실도 있습니다.
일본인 沙也可(사야가, 한국 이름 金忠善). 그는 참 영웅이었습니다.
일본인이었지만 조선인이 되었고, 침략군이었지만 평화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때 21세의 나이로 일본군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
장으로 삼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월 13일 부산 동래에 상륙 했습니다.
명분없는 전쟁에 대한 불만과 조선의 뛰어난 문화에 감탄하여 상륙한지 1주일
만인 4월 20일 경상도 병마절도사 朴晋(박진)과 金應瑞(김응서)에게
"내가 못난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싶다."
라는 편지를 보내 귀순의 뜻을 밝힌 후 귀순하였습니다.
조선에 귀화하여 경주, 울산등지의 싸움에 출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귀화하면서 이름을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1571~1642) 으로 사사 받은
후 나라에 큰 난이 일어날 때마다 스스로 전장에 나아가 적을 물리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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