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목록과 분서갱유

鄭宇東 0 2,017 2011.10.04 20:50
금서목록과 분서갱유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천부의 인권이고 양보할수 없는 기본권입니다.
그러나 정치나 종교의 집권세력은 특정 사안의 진리나 진실의 여부에 따라 판단
하지 않고 그들의 호오감정이나 입맛에 들지않으면 자의적으로, 사회에 불온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위험도서라 천단하고 금서- 판금조치를 자행하여 왔습니다.
저쪽 서양에서는 금서조치와 저자에 대하여는 종교계의 파문조치가 행해졌습니다.
이쪽 동양에서는 진시황제처럼 서책을 불태웠(焚書)을뿐만 아니라 탄압의 정도를
넘어서 유학자들을 잔학하게 생매장까지 하였습니다(坑儒).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제일 많이 팔린다는 고전중의 고전인 바이블성경도
한때는 AD 400년경 聖히에로무스가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성경과 이보다 훗날
의 영국 제임스왕의 흠정성경을 제외한 다른 판의 성경은 모두 금서였다는 사실
에서 우리는 역사의 맹목성과 종교의 편협성에 아이러니를 느낍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암 블레이크가 "모두가 밤낮으로 성경을 읽지만 내가 희다고 읽
은 부분을 다른 사람은 검게 읽는" 성경의 다의성을 주장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날의 고전의 대수분은 옛날의 한때에 금서로 찍혔다가 해금되었습니니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인 마르틴 루터의 <95개조항>이 교황으로부터 금서로 낙인되
고 엄청난 남북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작은 스토우부인이 쓴 <톰아저씨의 오두막>
이 남부정부에 의해 금서가 되었고,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종교적인 이유
로 이슬람권에 의해 금서가 되었고 또 저자에 대하여 사형선고까지 내려졌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고전급 양서가 금서로 낙인찍힌 이유도 가지각색이어서
정치적인 이유로 탄압받고 금서로 된 서책으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존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 토마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공저 <공산당 선언>,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
조지 오웰의 <1984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등이 있으며
또 그리고 종교적인 이유로 금서가 된 책으로는
만고만민의 복음서인 <성경>과 필독서를 의미하는 <코란>,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항>, 볼프강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 등이 있으며

선정-외설등 성(색)적인 이유로 해서
인도의 바츠야야나가 지은 영원한 性典 <카마 수트라>, 복카치오의 <데카메론>,
리차드 버튼이 번역한<아라비안 나이트>,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D.H.로런스의
<채털리부인의 사랑>,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같은 책은 말할 여지도 없이 금서가 되었으며
그리고 또 사회적인 이유로 해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 월트 휘트먼의 <풀잎>,  J.D.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등이 금서목록에 올라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동양에서도 진나라 시황제는
중국최초의 통일전제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지리 멸렬한 여론과 사상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재상 이사의 주청을 받아드려 중구난방 펼쳐지는 제자백가설을 억압
하면서 농경과 의술, 점복등 실용서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태웠고 반론을 제기하는
유학자들을 잔혹하게 생매장한 사건이 분서갱유의 진상입니다.
이러한 고난과 횡포의 시대가 오기전에 이에 대비한 공자의 앞날을 내다보는 선견
지명과 지혜로 집 벽장안에 숨겨 둔것을 후대에 와서 집을 수리하다가 발견했는데
이렇게 해서 살아 남은 서책들이 공자벽서입니다.

이와같이 금서조치는 정권과 종권이 있는 곳에서는 양의 동서나 때의 고금을 막론
하고 행해졌으며 심지어는 민주 자유정부의 모범이라는 미국에서도 존재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예외없이 금서와 판금조치가 만만찮게 있었는데
김지하의 <五賊>,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후광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방영웅의 <분례기>,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등 월북작가의 작품이 금서로 묶여 있었고, 마르크스의
<자본론> 같은 경우는 책의 소지와 이용은 물론 이것의 이차자료의 인용조차도
금지되었으며, 심하게는 채동선의 명곡이 된 정지용의 <고향>과 이미자가 불렀
던 가요 <동백 아가씨>등도 한때는 왜색가요라 하여 부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언론과 인권을 탄압-유린하는 일련의 금지조치들에 대하여 사상계지는
1959년 2월 통권 제67호와 1966년 11월 통권 제163호의 <백지권두언>으로
무어무자의 웅변으로 항의하였고 또 이에 더하여 동아일보가 <백지사설>을 실
어 무관제왕의 위용과 전통을 맥맥히 보여 주었습니다.
아무턴 이러한 항의와 인권의식에 의하여, 개명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형제
도에 대한 사형선고가 멀지않다고 말하여지듯이 지금까지의 금서와 판금조치도
이제 사형선고를 받을 날이 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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