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無窮花 Hibiscus syriacus)

鄭宇東 0 1,574 2011.10.02 21:51
무궁화(無窮花 Hibiscus syriacus)
 
* 무궁화의 이름
무궁화는 소아시아가 원산지이며, 인도·중국·한국(평남·강원 이남) 등에 분포
합니다. 무궁화의 명칭은 여러 가지이며 중국에서는 목근(木槿) · 순영(舜英) ·
순화(舜華)· 훈화초(薰華草)·조개모락화(朝開暮落花) 등으로 쓰였으나 무궁화
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한자로 무궁화(無窮花)로 쓰는데
이 이름은<목근>이<무궁>으로 변음되어 생긴 것으로 보이며 고려 고종 때
의 학자인 이규보 (李奎報)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 목근화가 무궁화로 쓰
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즉 목근(木槿)의 중국식 발음은 베이징 관화[北京官話]의 경우<무친(muchin)>
과 비슷하게 소리나고, 조선 초기의 운서(韻書)들에 의거해 보면<무긴>정도
로 발음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자 유입 이래의 한자어는 초기에는 중국
식 발음에 의거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한국 한자음화됨으로써 중국
식 원음과 한국한자음화한 것이 병존하는 시기를 거쳐, 결국 한국한자음의
음만이 남게 되는데, 무궁화의 경우<木槿>에 대한 한국한자음이<목근>으
로 정착되는 과정에 상응하여 중국 원음 역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무궁>
으로 변음되어 이중어(二重語)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로 된 내력
한국에 일찍부터 무궁화가 있었다는 것을 전해주는 가장 오래 된 기록은
동양 최고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군자국에는 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君子
國 有薰花草 朝生暮死)>라는 기록이 있는데, 훈화초는 무궁화를 가리킵니다.
《원중기(元中記)》에서도 <군자의 나라는 지역이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다
(君子之國 地方千里 多木槿花)>라고 하고 있으며, 《고금주(古今註)》에도
비슷한 기록이 전한다고 합니다. 또한 신라에서도 최치원(崔致遠)이 지어,
효공왕(孝恭王)이 당나라 소종(昭宗)에게 보냈다는 국서(國書)가운데 한국을
<근화지향(槿花之鄕;무궁화의 나라)>이라 하였는가 하면, 고려 예종 때에
는 고려를 스스로<근화향>이라 자칭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예로부터 중국인들은<군자의 나라 동이(東夷)는 사람들의 민족성이 군자답
고,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라고 예찬함으로써 한국을<무궁화 피는
화려강산>으로 인식하여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조선시대 광해군 때의 실학자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
에는<군자의 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있어 꽃을 피운다>라고 적고 있으며,
숙종때의 학자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무궁화에 관한 기
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에게 임금
이 어사화(御賜花)를 내렸는데, 어사화의 장식이 무궁화꽃이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무궁화에 대한 날조된 비난과 왜곡이 있었습니
다. 그러나 우호익(禹浩翊)은<무궁화예찬>이란 글을 통하여 일제의 만행
과 왜곡된 허상을 반박하고, 독립의 의지와 민족의 자긍심을 강조하였습니
다. 또한 안창호(安昌浩)· 윤치호(尹致昊)· 남궁억(南宮檍) 등도 무궁화에
대한 사랑으로 민족정기를 일깨우려 하였습니다.
 
국화(國花)로서의 무궁화는, 국기(國旗)나 국가(國歌) 같이 확실한 법규정이
나 역사성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궁화는 3000여 년 전부터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인용되었
고, 더욱이 1948년 정식 채택된 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후렴구를 사용함으로써 국화로서의 의미를 인정 받았습니다. 또한 입법·사법·
행정 삼부 (三府)의 표상으로 무궁화가 사용되고, 국기의 봉도 무궁화 봉오리
로 제정되어 무궁화는 명실상부한 나라꽃이 되었다고 합니다.

 * 무궁화의 전설 - 1
고려 16대 예종왕 때 일어난 일입니다. 예종 임금은 참으로 사랑하는 신하가
셋 있었습니다. 세 신하를 똑같이 아끼어 벼슬도 똑같이 참판 벼슬을 내렸지요.
신하들은 그렇지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종 임금에게 더 잘 보이
려고 하였습니다. 더 잘 보이려고 하니, 서로 시기하고 헐뜯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사람 가운데 한 사람 구 참판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비단결 같은 구 참판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 때면, "쓸데없는 소리
마오. 그 친구를 욕하면 내 얼굴에 침뱉기요." 하고,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정 참판과 박 참판은 둘이 만나면 구 참판 이야기로 하루 해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정참판과 박참판은 구참판을 궁궐에서 쫓아내기로 서
로 짠 것입니다.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예종
임금은 그것을 사실로 믿었습니다. 정참판과 박참판의 꾐에 넘어간 것입니다.
"네 마땅히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나, 경상도 땅으로 귀양을 보내노라. 종 하
나를 붙여서....." 임금님은 말끝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박참판과 정참판의 흉
계인 줄을 뒤늦게 알았으나, 왕은 두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구참판은 임금님 앞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한 번 떨어진 명령은 어쩔 수 없기
에 구참판은 귀양지로 가야만 했습니다. 귀양지에 도착한 구참판은 개성쪽으
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로지 임금님 생각만 하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역적이 된 구참판의 집안은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부인은 종이
되어 끌려갔고, 아들 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조차 모릅니다. 그러나
구참판은 임금님을 원망하지 않고, 임금에 대한 충성심은 날로 더해만 갔습
니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며 구참판의 임금을 향한 기도는 계속되었습니
다. 보다 못한 시종이 음식을 먹기를 간청했지만, 구참판은 그것마저 거부하
였습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던 어느 보슬비가 내리던 날 밤 구참판은 조용
히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를 따르던 시종은 슬피 울며 구참판을 양지
바른 곳에 묻었습니다. 다음해 봄, 구참판의 묘 앞에는 예쁜 꽃이 피었습니다.
이 꽃이 바로 우리나라의 국화, 무궁화입니다. 임금님을 사랑한 마음이 너무
나 뜨거워 무궁화꽃 속은 빨간빛이 되고, 자신의 무고함을 사람들에게 알리
기 위해 꽃잎은 하얀빛과 보랏빛등으로 피어난 것입니다.

 * 무궁화의 전설 - 2
옛날 북부 지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시를 잘 짓고 노래를 잘하는 데에다 생긴 것마저 어여쁜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랑스럽고 어여쁜 여자의 재주
를 칭송하며 그를 아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여자의 남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쁜 여자는 마음씨까지 고와 자신
의 남편을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남편의
손과 발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여자를 유혹하였지만 이 여자는 흔
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을 다스리던 성주가 그녀의 재주
와 미모에 반해 그녀에게 유혹의 마수를 뻗쳤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애가 탄 성주는 마침내 부하를 보내 강제로 그녀를 잡아
들였습니다. 그녀를 성에 데려온 성주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녀의 환심을 사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남편만을 사랑했던 그
녀는 끝까지 성주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성주는 너무나 화가 나 그녀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은 뒤 성주
는 그녀의 절개에 감탄을 하며 그녀의 시체를 남편이 살고 있는 집안 뜰 앞에
묻어 주었습니다. 그 후 그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는데, 이 꽃나무는 자라고
자라서 집을 온통 둘러쌌습니다. 마치 장님인 남편을 감싸주고 보호해주려는
듯 말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꽃을 일컬어 울타리꽃이라 불렀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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