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에로티시즘

鄭宇東 0 1,526 2011.10.01 18:49
이런 저런 에로티시즘


그네를 타고 있는 밑에서 펄럭이는 치마속을 훔쳐 보고 있는 신사의 가늘어진 눈
물가에 선 여인의 물속에 비친 속살을 그린 화가의 끝내주는 관찰력은 소그림의
눈에 눈부처를 그려 자기그림의 확인 자료로 삼았다는 중국화가에 필적 할만 합
니다. 우리나라 풍속화에서는 춘화라도 춧담 위에 남녀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방문을 닫아 건것으로 남녀 상열지사를 곱사하게 표현하는 은근과 점잖음이 있는
데 비하여 일본 우키요에의 과장과 무염치는 서로 다른 국민정서의 일면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다고 하여 일본이 성애의 나라라고 치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
다. 내가 읽은 일본 작가 구라다 햐꾸조오(倉田百三) 가 <사랑과 인식의 출발>에
서 젊은 부부가 아침에 정교를 나누고 남편의 출근중 남편의 분신과 같이 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성애를 멀리 초월한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테세우스가 아테네를 수도로 삼은 것을 기념하여 수호여신 아테나를 기리는
축제를 연곳이 판아티니코 경기장입니다. 이 스타디움의 입구에는 얼굴을 둘가
진 재미있는 헤르마석상이 서 있으며 이 석상은 노인과 젊은이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노인의 성기는 발기해 있고 젊은이의 성기는 축 늘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는 고대로부터 운동경기로 민족의 화합을 다져 왔었고, 이곳 사람들은
운동을 열심히 하면 노인도 이렇게 힘찰수 있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젊은이도
저렇게 나약해 질 수 있다는 메세지를 전해 주고 있다고들 말합니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조각상이며 또 저런 해석 또한 무슨 둘러대는 해석입니까?

벗기는 예술의 대표주자는 연극과 영화에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땅바닥에 질질 끌리며 잔뜩 부풀렸던 궁정 옷차림과
발레 초창기에는 한때 황제가 발목이 보이지 않게 입도록 칙령까지 내렸으나
이제는 튀튀복처럼 아슬아슬하게 짧아지고, 신체의 윤곽선을 확연히 보인다하
여 디아길레프가 해고당한 타이트한 차림에 보는 사람이 미안할 때가 다 있지
만 한편으론 그것을 은밀히 즐기는 편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모리스 라벨이 전위 무용가 루빈슈타인의 의뢰를 받고 작곡한 무용곡 볼렐로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묘한 성적 감흥을 느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간단한 두가지 주제가 악기들을 추가해 가면서 약에서 강으로 크리센딩하는 주법
은 단조로운 느낌이 들지만 우리들이 태어나기전의 모체의 두근 두근하는 심장의
고동소리에 친숙하듯이 이 노래를 들으면 마냥 편안하고 안온한 느낌마저 듭니다.

문학가들은 그들의 성적 환상을 대중에게 점염시킵니다.
D. H. 로렌스는 차탈레이부인에서 생기발랄한 성생활을 추구하며 한 성애 장면
에서 상대방의 벌거벗은 나신위에다 여러가지 꽃으로 장식하는 유희를 벌입니다.
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는 상고인들의 옛날부터의 많은 성적환상을 집적하고
있는 사례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중세의 암흑기를 ㅡ 아니 어쩜 신앙우월의 시
대라고해야 할ㅡ 지내고 근대의 여명에서 나온 데카멜론도 그렇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핸리 필딩의 존 톰즈와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이 외설
시비에 걸려 출판이 금지되었고, 마광수교수의 즐거운 사라도 이런 유서에 속한
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자라 정죄 하였습니다.
미술에서 보고 음욕을 품고 간음하는 것이 시간(視姦) 이라면
음악에서 듣고 음욕을 품고 간음하는 것은 청간(聽姦) 일텐데고
문학에서 읽은 음욕을 품고 돌려읽는 것은 윤간(輪姦) 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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