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의 달걀

鄭宇東 0 1,750 2011.10.01 08:55
콜럼버스의 달걀
 
 
콜럼버스가 인도라고 믿었던 신대륙을 발견하고 득의 양양하게 귀국하였을때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의 공로를 찬양하기는커녕 도리혀 시기하고 무시하
는 태도를 보이자 콜럼버스가 달걀을 꺼내 놓고 탁자위에 세워보라하니 아무도 시
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달걀의 밑을 깨뜨리고 그대로 세웠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한다면 나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콜럼버스는
무슨 일을 선구적으로 처음하는 자의 어려움과 용기를 이렇게 설명해 내었습니다.
그는 사안에 대한 판단력이 빠르고 결단력이 뛰어났던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곧잘 사람들은 이 사안을 두고 수평적 사고의 혁명적 사례로 인용해 왔었습니다.

이것이 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생명을 훼손 파괴하여 달걀을 깨뜨리는 폭력적 야만성에서 무죄하고 무수한 아메
리카 원주민의 희생을 곧 바로 상정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나이고 우리 일반인이
면 달걀을 깨뜨려서 세운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용인될 수없는 일로 전제되겠지만
콜럼버스 그 사람에게는 그런 윤리적 정조가 애시 당초부터 무시되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출항은 본격적인 식민주의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식민지에 서 빼앗은 부와 이 부를 원시 축적하여 이룩한 산업혁명의 신화가 현대
사의 신념 체계라면 콜럼버스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식민주
의의 가장 큰 특징이 자기와 똑 같은 동류(同類)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그리고
자기를 추종하게 하는 것이라면, 지중해를 벗어난 유럽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오
늘날 도도하게 전개되는 세계화 논리의 출발 지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유럽이 중세를 벗어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콜럼버스가 이 항구를 떠난 1492년은 바로 그라나다에 있는 아랍왕조 최후의
궁전인 알함브라 궁이 함락되는 해입니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 왕이 결혼함
으로써 통일을 이룩한 스페인이 800년간의 아랍지배를 청산하고 '국토 회복
(Reconquista)'을 완료한 스페인 통일의 원년입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출생하였고 1477년에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의 행적은
명백하지 않지만 상당한 학식을 지녔으며,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였습니다.
1479년 결혼하였는데, 그의 장인이 선장이었기 때문에 해도제작에 종사하였습
니다. 이 무렵에 그는 수학자 P.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
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1484년 포르투갈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헌책하였으나 희망봉 루트
를 준비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아 에스파냐로 가서 마침내 이사벨라 여왕의 지
원을 얻어 신대륙의 발견의 대역사에 들어갔습니다.

'콜럼버스는 왜 서쪽으로 갔는가?'
이 물음은 한마디로 답변하기 어려운 역사의 덩어리입니다.
콜럼버스의 출항을 황금과 향료에 대한 탐욕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
스도를 본받는다 (크리스토퍼)'는 콜럼버스의 이름풀이로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과학적 탐구로 격상시킨다거나, 이사벨
라 여왕과 후아나 공주에게 바치는 바닷사나이 콜럼버스의 연정으로 격하시킨다
는 것은 더욱 가당찮은 일입니다.
그가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에 자행된 1,600만명에 달하는 신대륙 원주민의 살육
과, 같은 수의 아프리카 흑인을 대상으로 한 인간사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
다. 오늘날까지 맥맥이 이어지고 있는, 그리고 21세기에도 청산되기 어려운 식민
주의적 국제원리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가 서쪽으로 간 개인적인 이유는 더욱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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