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刑問題小考 ㅡ Ab Minimum Ethicae ad Maximum Ethicae ㅡ
鄭宇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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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8 10:44
死刑問題小考 ㅡ Ab Minimum Ethicae ad Maximum Ethicae ㅡ
--------------------------------------------------------- [釜大 시니어 대학노오트에서] ---------------------
( 一 )
나는 나치스 獨逸의 良民虐殺蠻行의 下手人 아이히 만 (Carl Adolf Eichmann) 이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의 情報機關 모사드에 의해 逮捕되어 死刑을 당했다는
報道에 接했을때 그같은 殺人魔가 우리와 幽命을 달리함이 고소하면서도 또 마음
한 구석에는 나같은 人間이 生命을 빼았겼슴이 좀 안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心理學에서 말하는 이른바 反對感情兩立(ambivalence)이란 現狀이 作用한 것이
겠다. 一般的으로 우리 人間은 어떤 한 事象을 대할 때 그것의 느끼는 深淺의 程
度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心中에 反對되는 愛와 憎의 反對感情이 兩立하
고 있슴을 알고있다.
어느 學者가 " 刑法學者의 livings thema이며 Cape Horn"이라고 했을만큼
存置論이든 廢棄論이든지 死刑에 關한 論議중에는 激情的인 무엇이 느껴진다.
이것만으로서도 死刑問題는 언제라도 爆發할 潛在性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핫
이슈임을 證明하며 또한 刑法學을 공부하면서 死刑에 관하여 論及하지 않은 사
람은 없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이와같은 死刑問題에 주어진 파토스적인 要所
에 마음이 끌려오던 나는 또 한 사람 아이히만의 죽음을 보면서 이 問題에 대한
나름대로의 어떤 풀이를 模索하며 나의 愚見의 一端을 펴 적는다.
( 二 )
死刑에 관한 最近의 思想動向을 먼저 살펴 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公共然한 死刑의 辯護者가 되는 勇氣를 가진 理論家는 거의
없을 듯하다. 오늘날에도 死刑의 必要를 말하는 非專門的인 一般人은 있지만 專門
家 사이에서는 그런 主張을 하는 사람은 지금 이제는 거의 없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한 世代前 外國 특히 이탈리아나 도이취에서는 조금 事情이 달라 있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는 오랫동안 死刑廢止論의 先驅者인 벡카리아의 祖國으로
서의 名譽를 지켜온 나라이다. 그것과 同時에 이탈리아는 또 長期間 死刑廢止國인
것을 자랑으로 삼아 왔다. 이러한 이탈리아가 위의 名譽와 자랑을 헌신짝처럼 팽개
쳐 버리고 1930년의 新刑法으로서 死刑을 다시 導入하였다. 當時의 司法大臣 알프
레도-록코는 이 刑法의 理由書에 해당하는 報告書에서 死刑의 再導入을 하나의 改
革이라 하고 있다.
그리고 나치스 도이취가 死刑에 관하여 이탈리아의 뒤를 따랐다.
1933년의 所謂 나치스 國民革命의 前後에 있어서 그 刑法의 젊은 代表者 役割을 한
學者에 담과 샤프 슈타인 두 사람이 있다. 이들은 從來의 自由主義적 刑法의 代身으
로 權威刑法의 필요를 提唱하고 또 權威刑法에 있어서 死刑의 重要性을 强調하였다.
이리하여 담은 "權威國家의 刑法은 死刑을 抛棄할수 없다. 死刑은 國民의 意識中에
상금도 完全하게 살아있고 實際 이것은 現代의 文化觀念과 矛盾되는 것이 아니며
權威思想을 특히 强烈히 나타내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 나치스 刑法學者의 主張은
나치스 刑法의 覺書에 公認되어 "死刑은 現行法에 있어서보다도 일층 더 廣範圍한
適用을 보아야 할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이 覺書가 나치스의 刑事立法을 指導하여
온 것이다.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死刑을 祝福과 더불어 再興시켰고
나치스 도이취는 國民的 意識이란 名分으로 死刑을 保持하여 그 適用範圍의 擴充을
宣言하였다. 이러한 死刑에 관한 思想의 背景에는 個人主義와 自由主義의 排斥, 全
體 主義와 國家主義의 强調, 全體는 언제라도 個人-個人의 生命을 全體를 위하여 犧
牲으로서 要求할수 있다는 하나의 基本的인 世界觀이 밑바탕이 되어 있다.
그러나 世界 제2次大戰에서의 聯合國의 勝利는 이러한 世界觀에 終焉을 告하도록
하였으며 價値觀의 轉換을 가져와 個人主義와 自由主義의 思想은 戰後 平和世界의
支配的인 理念으로 되었다. 이리하여 國際軍事裁判이 열려 戰犯으로서 相當數의
生命을 빼앗아 간 것조차도 人道主義의 이름밑에서 행하여진 個人主義에의 처음이
자 마지막의 忠誠이라고 辨明하고 있으나 人道主義는 犧牲者와 加害者라는 區分으
로 二重잣대
를 適用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 三 )
死刑의 存在는 原始的 制도의 殘滓로 생각되지만 그 起源에 관하여서는 正確히 알려져
있지 않다. 死刑은 近代的 自由刑 즉 徵役이나 禁錮와는 全然 系統을 달리하고 있는것
이므로 死刑의 緩化된 形式이 自由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歷史的으로는 잘못이다.
自由刑을 根幹으로 하는 近代的 刑罰制度에 있어서는 死刑은 過去의 遺物이며 異分子
的 存在이다. 그러나 死刑의 이러한 性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存在하는 것은 否定할
수 없다. 問題는 이것을 存置할 價値가 있는가 또는 存置할 價値가 없는고로 이를 廢棄
할 것인가에 있다. 이 價値의 問題를 다루기 전에 그 存在의 모습을 먼저 알아본다.
死刑은 刑法과 그 歷史를 같이 한다고 할수 있다.
실로 刑法 있는 곳에 死刑을 보지 않을수 없다. 그렇더라도 오늘의 開明된 社會의 刑法
에 있어서는 死刑에 處하는 犯罪의 數를 縮小시켜가고 있으며, 宣告되어지는 死刑의
수도 執行되어지는 死刑의 數도 함께 점점 減少되어 가고있다.
그리고 死刑의 執行方法에 있어서의 變遷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斬首 燒殺 絞殺
撲殺 車裂 生埋등등 人智가 考案할수 있는 限의 慘酷한 方法에서 될수 있는 한 簡單히
生命을 끊는 方法을 擇하게 되었다. 死刑의 方法도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그 國內에서
는 單一化되어 있으며 그 執行을 非公開裏에 하고 있다.
이와 같이 死刑制度를 認定하는 나라에 있어서의 오늘날의 死刑의 모습은 무엇인가
可憐히 보아주어야 할 存在로 변하였을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깡그리 死刑을 인정
하지 않는 나라도 그 數를 더하여 死刑을 存置하는 나라와 거의 同數가 되었다. [註 1]
오늘날의 死刑은 어느 側面에서 보아도 瀕死狀態에 놓여있다.
그리하여 死刑에 대한 死刑宣告는 人類文化의 긴 歷史上에서 보면 그리 먼 將來의
일은 아닐것이다.
( 四 )
死刑에 관한 論議에 있어서만큼 理性이 必要한 것은 없다.
이것은 어느 누구라도 認定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死刑을 肯定하는 쪽이든 否定
하는 쪽이든간에 사람들은 自己主張의 根據로 다 같이 理性을 내세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 그들은 못말리게도 自己主張의 根據를 神에게서 求하기조차 하고 있는 것이다.
------------------------- 이하 釜大新聞 19630911 제3면 學生論壇에 게재 ------------------
# 死 刑 問 題 노 오 트 #
ㅡ 鄭 宇 東 (法 四) ㅡ
死刑이 正當하냐 않느냐는 宗敎上의 問題로서는 16세기 이후 다투어진 바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社會的 問題로서 다루어지게 된것은 啓蒙時代의 18세기에 비롯
한다. 個人 理性의 優越을 주장하고 人間의 尊重을 말하는 自然法的인 合理主義와
社會生活에 있어서 人間의 苦痛에 대한 同情을 말하는 휴매니즘은 무엇보다도 먼저
權威主義的 國家에 있어서의 刑罰의 苛酷性에 대하여 강한 批判을 가하였다.
死刑制度, 拷問制度는 個人理性의 尊嚴性과 人間性에 反하는 가장 野蠻스럽고 慘酷
한 制度로서 그 廢止가 强力히 主張되었다. 이와 같은 刑罰制度, 訴訟制度의 寬容化
의 運動에 있어 指導的 役割을 한 思想家는 벡카리아와 몽테스큐이다. 벡카리아는
그의 有名한 著書<犯罪와 刑罰> 중에서 社會契約說을 基本으로하여 死刑制度의
廢止를 强力히 主張하였고, 또 몽테스큐는 그의 著書 <法의 精神>에서 刑事法의
寬容化를 主唱하였던 것이다.
刑罰이 어떠한 境遇에도 應報라는 觀念을 그 밑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刑罰의 目的
은 刑罰 그 自體에 있는 것이 아니고 社會의 理想인 共同生活의 圓滿化를 위한 社會
의 保護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刑罰중의 하나인 死刑 (Todesstrafe) 은 犯罪人의
生命을 끊어 이를 永久히 隔離, 排除하여 社會를 防衛하자는 刑罰이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死刑은 刑法과 그 歷史를 같이 한다고 할수 있다.
실로 刑法 있는 곳에 死刑을 보지 않을수 없다. 그렇더라도 文明의 進步가 死刑實
行 의 경우를 縮小시키기에 이른것 또한 疑心할수 없다. 現代의 刑法에 있어서는
死刑을 科하는 경우가 줄어들었을 뿐아니라 死刑의 方法도 될수 있는 한 簡單히
生命을 끊는 方法을 選擇하고 옛날과 같은 無用한 苦痛을 주는것을 避하고 더 나
아가서는 死刑의 種類라는 것을 認定하지 않기도 한다.
이와 같은 死刑의 歷史는 옛날의 應報觀念과 오늘날의 應報觀念과에 ㅡ잘된 것인지
못된 것인지는 몰라도ㅡ 어떠한 變質이 있는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P. Reiwald가 그의 <社會와 犯罪人>이란 책에서 "社會가 마치 靑銅의 大盤石의 위에
存立하고 있는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幻想에 지나지 않으며 傳統的인 刑罰觀도 그러
한 幻想에 속한다." 라고 한 말을 아주 否認해 버릴수는 없을 것이다.
"復讐는 일종의 野蠻스러운 正義이다." 라고 Bacon은 말하고 있다. 나는 이 말을 나의
全心境으로 쫓는 것이다. 應報라는 것이 무엇인가는 一義的으로 決定되지 않는다.
움직임에 대한 되움직임으로 생각한다면 刑罰은 惡因에 대한 惡果로서 是認되어지며
復讐本能의 具像化로서의 意味를 가진다. 그렇지만 그것은 原始社會의 刑罰을 說明할
수는 있어도 現在의 刑罰이 가지는 文化的 機能을 說明하지는 못한다. 文化는 本能을
되려 抑制하고 靜化하여 그것에 代身하는 合理性을 要求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單純한 復讐가 아니고 움직임과 되움직임과의 分量의 平等이 要求되어 진다.
(왜냐하면) 平等은 正義이기 때문이다. 다만 平等을 事實的으로 解하는가 價値的으로
解하는가에 따라 同害報復論과 等價的 應報論으로 나누어 진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ㅡ 옛날의 우리 祖上들도 마찬가지지만 ㅡ 嚴密하게 數字的
이고 自然科學的인 동해보복(同害報復)이란 있을수 없으며 人間理性이 合理的이라고
是認하는 等價的 應報에서 우리의 復讐本能도 妥協하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等價的
應報라는 것도 人間이 옛날의 人間 그대로가 아니듯이 殘虐行爲를 是認하는 데서 이
를 否定하는 데로 내 닫고 있는 것으로 理解되며 이것은 文化發展의 當然한 過程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말하자면 刑罰은 그것의 基低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 應報라
하더라도 결코 움직임에 대한 되움직임으로서의 原始的인 復讐를 意圖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野蠻스러운 正義에서 文化스러운 正義에로 志向하는 刑罰자체의
간절한 時代文化的 要請은 刑罰중에서 가장 野蠻스럽고 慘酷한 死刑의 廢止를 全面
으로 내세우기에 充分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으)로서 刑罰의 本質에서의 檢討는 맺고 그 目的에서 잠간 생각해 보자.
一般的으로 槪念이란 認識主體인 人間이 對象에 대하여 어떠한 態度를 取할 때만
成立하는 것이다. 例컨데 冊床을 定義하면서 아무리 사각이라든가 나무로 만든 것
이든가를 說明해 보아도 그것에 대한 우리의 어떠한 態度를 取함이 없이는 즉
使用의 目的이 明示되기 前까지는 완전한 定議를 할수 없는 것이다.
刑罰의 目的이 무엇인가는 論爭으로 될 수 있어도 刑罰에 어떠한 目的도 없다고
다투지는 않으리라. 刑罰을 싸잡고 있는 法이 元來 人間이 만든 것이기에 ...........
Stoss 가 "應報는 刑罰의 本質일지는 몰라도 그 目的이 될수 없다" 고 하였듯이
刑罰이 盲目的 本能的 衝動的인 反作用에서 當事者의 손을 떠나 冷情한 批判者인
國家의 手中으로 들어간 今日에 있어서는 國家 自身의 防衛와 安寧保持에 刑罰의
目的이 있다 할것이다.
어떤 目的을 위한 手段은 唯一하다고만 할수 없으며 여럿중에서 더 좋은 것을 選
擇함이 우리 理性이 命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排除 내지 社會保全을 위한 目的으로 死刑만이 唯一하며 合理的인 手段
인가? 이 問題에 대하여는 Liepmann 이 死刑으로 達하여 지는 目的은 無期刑 또는
不定期刑 내지 保安監置를 가지고서도 이룰수 있다고 말해 주는 것으로서 좋은
解答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하나 더 말해야겠다.
人間의 裁判에는 誤判이 반드시 없다고 斷定힐수 없으며 이런 狀況아래 死刑을 認
定할때 誤判에 의하여 그대로 執行하고 나면 犯해진 裁判의 誤謬는 絶對로 挽回할
수 없게 되니 結局에는 善良한 市民의 生命을 根據없이 剝奪하는 無慈悲한 結果가
되는 것이다. 死刑廢止論의 古典인 저 "犯罪와 刑罰"을 쓰게한 하나의 動機가 되는
1761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Geancalas事件이 誤判에 기인한 死刑事件이었음은
有名한 事實이며 또 우리는 먼 프랑스에서 끌어 올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그것도
먼 옛날이 아닌 바로 몇해전의 金大領사건이 역시 이랬음을 안다. 그들의 無罪함이
白日下에 드러났건만 한번 가버린 그들을 어느 뉘라서 다시 불러 오겠는가?
예수 가로되 "사람이 만일 온 天下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라 하였다. 이렇듯 生命은 온 天下보다 貴하다. 이러한 生命을싸 줄수 없는 줄을
알거든 끊지도 말아야 한다.
以上의 論議에 덧붙혀 一般人이 死刑을 犯罪豫防의 위하(威口+赫)의 手段으로 보고
있으나 社會學者들은 死刑廢止後의 犯罪增加의 統計的 數字는 廢止前과 別差異가 없
는것을 보이면서 死刑의 威嚇적 效力의 減少를 實證하고 있는 点과 좀 색다른 議論으
로 그 焦點을 犯罪人보다 被害者에 옮겨 被害報償을 論據로 하는 立論 (花田, 正木)은
앞으로 刑法論이 마땅히 硏究해야 할 部分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諸種의 論議는 한데
합쳐서 死刑廢止論의 强力한 論據가 될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럼 내 말의 끝을 맺어야겠다.
어떠한 問題에서든 그렇듯이 이 問題를 解決함에 있어서도 무엇이 우리가 願하는
바이고 價値的이냐 하는 "權利問題"와 우리의 現實이 願할것이냐 하는 "事實問題"
가 픽업되는 것이다. 理想의 問題에 있어서는 死刑은 理性的인 國家의 制度로서
이를 存續시킬 何等의 根據가 없으며 이는 우리의 自由社會의 理念과 矛盾된다고
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지만 現實의 問題로서 政治的 事情과 一般國民이 受容할 것
이냐에 닥쳐서는 다소 躊躇하지 않을수 없다.
솔로몬은 傳道書에서" 天下에 凡事가 期限이 있고 모든 目的이 이룰 때가 있나니
---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
며 ---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 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이야
말로 死刑廢止를 내세움이 저 智慧者가 말하는 時宜를 탄 主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文化가 死刑廢止의 趨勢를 宛然히 하고 있는 이때 다소 無理를 하여 얼마
간의 잘못 [註2]과 犧牲이 따르더라도 그것을 더 높은 價値를 위하여 따르는
不可避한 惡으로 참으면서 이제껏의 觀念에서 脫皮하는 創造的 破壞를 가져 와야
할 것이며 또한 法에 이러한 創造的 機能을 賦與함은 "倫理의 最小限度 (Minimum
Ethicae)" 란 矮小法에서 "倫理의 最大限度 (Maximum Ethicae)" 가 되는 巨大法으
로의 法의 自己發展의 姿勢를 이루는 것이다.
인간을 일러서 Homo Sapience 라 한다. THINKING 이것만이 人間의 最初이며
또 最後의 財産이다. 이것을 펼쳐 淨善에 達하는가 하면 또 極惡에로 墮落하기도
한다. 이러한 人間은 神이나 惡魔에로의 無限定한 可能性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다만 人間은 理想을 追求하는 限 살 價値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人間
의 意志活動은 모두 單純한 自然必然의 過程이 아니고 目的追求의 活動이며
理想追求의 過程이기 때문이다. 나 Eros 는 비록 어미 Penia (貧困의 神)에게서
났지만 將次 아비 Poros (富裕의 神) 로 發展 發達하는 것이다.
------------------------------------------------ [ 註 ] --------------------------------------------------
[註 1] 死刑을 廢止한 나라로는 네델란드, 덴마크, 스웨덴, 南美제국, 스위스연방,
아메리카합중국의 8주, 핀랜드, 벨기에 등의 나라가 있고
廢止의 方法으로 스위스연방처럼 立法的으로 하는 것과 벨기에, 핀랜드처럼
裁判上 死刑을 科하지 않는 것이 있다.
라드브루흐(Radbruch) 에 의하면 모든 人工物은 目的을 떠나서 理解할수 없다고
하면서 위와 같은 冊床의 定義에 對한 說明을 베풀고 있다.
[註 2] 死刑을 廢止하고서도 社會感情이 "그를 處罰하는것이 不正이 아닐뿐더러
그의 惡行이 處罰되지 않고 放置되는 것이야 말로 不正" 이라고 말할 極惡者에
對해서는 死刑을 處할수도 있을 것이다. 國際軍事裁判이 行하여진 것과
스위스初案이 死刑을 廢止하면서 軍刑法으로 死刑을 오직 戰時에만 適用할 것으
로 한것은 死刑廢止후의 社會感情에 應한 制裁의 길에 대한 좋은 敎示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