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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보리피리[한하운 시/조념 곡]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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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념의 철학적인 작품세계-
작곡가 조 념씨는 철학적인 체취가 진한 예술가다.
물론 그런 그의 체취가 바로 그의 작품세계에서 그대로 풍긴다는 것은 아니다. 소재가 그대로 예술일 수는 없다. 그러나 조씨는 적어도 소재인 그 자신을 완전히 선율화 하려는 끈질긴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김형주씨는 60년대 중반 『우리 악단에 아쉬움이 많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사상빈곤에서 탈피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이론면에 궁색을 느끼고 있을 터이지만 1년을 통해 새로운 학설이나 논문 한 편이 없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김형주씨의 이 말은 70년대에 들어와 얼마만큼이나 수정이 가해졌을는지 의문이다.

조씨의 가곡 「보리피리」의 작곡 동기는 별반 드라마틱한 데가 없다. 조씨도 남과 같이 6.25라는 민족의 대참극을 겪었다. 그는 관념 속의 민족을 피로 체험했다.
그 결과는 전통에의 回歸였다. 한국이 뭣인가? 한국을 어떻게 작품 속에 담는가?
『민족적인 것을 해보고 싶었습니다.』라는 짤막한 말로 그는 그때의 그의 심정을 표현했다.
수복후 1·2년이 지난 때였다. 그는 그의 심정의 단적인 표현을 가곡으로 하고싶었다.
『많은 시집을 뒤져봤지요, 한 하운씨의 「보리피리」를 보고 작곡할 생각이 났습니다.』
한국적인 서정이 그의 창작욕을 자극했다. 『소월은 너무 흔한 것 같았고…. 멜로디를 만들어봤는데 잘 안 되더군요. 몇 달 동안 팽개쳐뒀었어요. 』

-傳統에의 回歸-
그는 멜로디도 그랬지만 과거의 낡은 하모니에서 탈피하려 했다. 현대 화성법에서 쓰는 4∼5도의 화음을 만들 시도를 했다. 작곡 동기와는 달리「보리피리」의 완성과정은 꽤 드라마틱하다. 그는 그 당시 신당동에 살고 있었다. 겨울이었다. 그는 학교 강당 같은 데에 있었다. 음악이 들려왔다. 테마는 예전에 어디에선가 들은 듯했다. 그는 온 신경을 귀에 모았다. 놀랄만한 아름다운 가곡이었다.
『아! 「보리피리」아닌가?』그는 그이 귀를 의심했다. 누군가 훌륭한「보리피리」를 작곡한 것이다.

그는 어두운 좌절감을 느꼈다. 질투심 마져 생겼다. 도대체 그 작곡가는 누군가? 그것은 꿈이었다. 그는 귓전에 아롱거리는 꿈속의 선율을 더듬어 5선지에 옮겼다.
『중앙방송국 음악과장에게 연락을 했더니 가져와보라더군요. 』
새 가곡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보리피리」는 먼저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민요조의 아름다운 노래에는 우리 민족의 설움과 한이 담겨있다. 그러나 작곡가는 그의 격정으로 애상어린 이 가락을 달래고 있다.
한 곡은 1주일 방송이 원칙이었는데 「보리피리」는 청취자의 반응이 좋아 2주일 간 방송되었다.
『처음으로 많은 작곡료를 받았어요. 』하고 그는 계면쩍은 듯 웃는다. 「보리피리」는 당시 공보부가 외국에 우리가곡을 소개하기 위해 만든 음반에도 수록되었다. 수록 작곡가 중 그가 가장 연소했다.

조씨는 그 뒤 기악곡 창작에만 전념, 이렇다 할 가곡작곡을 하지 않았다.
『창작욕을 자극하는 시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죠.』라고 그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지난 70년 그는 어느 젊은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작곡해 볼 생각이 들었다.
그는 71년 5월「보리피리」도 수록된 가곡집을 출판하고 그해 가을 이 가곡집을 중심으로 한 발표회를 시민회관에서 가졌다.
음악 평론가 유한철씨는 『어둠 길 헤쳐나오는 가느다란 촛불인양 곡들이 저마다 몹시 소중했다.』고, 이성삼씨는 『강직한 그이 성품이 반영되어 있다. 때로는 개중 작품이 대중들에게 재빨리 어필 못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어느 새 은근하게 친근감을 자아내는 매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또한 김형주씨는 『가곡 전반에 연연히 흐르고 있는 작가적 기조는 역시 구성진 민족적 정서와 슬기라 할 수 있다. 이를 그는 가식 없이 소박하고 순수하게 노래를 통해 표현해주고 있다.』고 평했다.

-「장 크리스토프」에 매혹되어 작곡으로-
조씨는 1922년 함경남도 혜산진에서 태어났다. 선친이 음악을 좋아해서 그는 음악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성장하여 일본으로 유학, 동양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 공부를 했는데 부전공으로 작곡을 택하여 콘스탄친 샤피로에 사사했다. 그가 작곡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로망 로랑의 「쟝 크리스토프」를 읽었기 때문이다. 학생시절 철학과 문학서적을 탐독한 그는 지금도 악상을 독서에서 얻는 수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오랜 세월을 질이 높은수상(隨想)을 쓰고 있는데 이 버릇도 그의 창작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는 고려교향악단과 서울교향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있었고 여러번 독주회를 가졌다.
작품으로는 「교향곡3번」·「교향시1번(불바다)」·「실내악곡」·피아노곡·오페레타 등과 「초혼(김소월 시)」을 비롯한 많은 가곡이 있다. 수도여사대교수(현 세종대)로 오래 있다가 지금은 관동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감상하기> 한하운 시/조념 곡/베이스 진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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