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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윤해영 시/조두남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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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자 조두남 선생은 1912년 평양에서 개화사상에 젖은 갑부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미국 콜럼비아대학을 나온 부친은 안창호 선생의 독립운동을 돕다가 투옥되어 그가 18세때 세상을 떠났다. 부친을 여의고 의욕을 잃은 조두남은 21세때 만주로 유랑을 떠났다. 조두남의 회고록「나의 넋두리 나의 세월의 앙금」에 의하면 만주를 방랑하던 1933년, 목단강 주변의 여인숙에 불쑥 찾아와 윤해영이라고 이름을 밝힌 젊은이가꼬깃꼬깃한 종이에 쓰인 '용정의 노래' 라고 쓰인 가사를 내밀었다. 
초췌하지만 형형한 눈빛이 독립운동가임을 알 수 있게 했던 청년은 『달포 뒤 찾아와 노래를 배우겠다』며 황망히 떠났으나 그 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조두남은 이 청년에게서 발견한 독립투사의 기상을 기리는 뜻에서 해방후「선구자」라고 제목을 고쳐 붙였다.

1987년 8월 16일 광복절날 특집으로 KBS라디오는 독립운동가 김동삼 일대기를 방송했는데 그가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이라고 소개했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나라사랑의 충정이 구구절절 베어있는 이곡은 듣는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곡은 민족의 노래로 애창되는 웅장하고 씩씩한 곡이다.

노래의 유래가 그러하듯 「선구자」가사는 그대로 용정의 모습이다.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을 떠나30Km 가량 북상하면 구릉지대가 끝나면서 탁 트인 평야를 만난다. 두만강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까지의 딱 중간쯤 되는 곳이다.일송정은 이곳 용정 너른 벌에 홀로 우뚝 솟은 비암산 정상에 서 있다.그러나 정작 일송정에 오르면「선구자」의 비장감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시멘트골격에 울긋불긋한 색깔을 입힌 중국식 작은 정자가 워낙 생경한 까닭이다.원래 일송정은 가사대로 정자처럼 그늘이 넉넉한 한 그루 푸른 소나무였다. 늠름한 기개와 고절의 표상이었던 노송은 이제 등걸로도 남아 있지 않고  대신 그 자리를 차고 앉은조잡한 정자가 공연히 뻔뻔스러워 보인다. 번듯한 나무 한 그루 보기 힘들어 주변도 썰렁하기 그지없다.  비암산은 서울의 남산정도인 듯한데 주변이 평지인 탓에 상당히 높아 보이며 화강암이 곳곳에  노출된 골산이어서 일찍이 시인 김기림이 「간도의 내금강」이라고 읊었을 만큼 전체적 경관은 상당히 빼어난 편이다. 현지인들이 흔히 범이 웅크린 상으로 표현하는 비암산의 머리부분에 일송정이 있고 허리에 선구자 탑이, 그 아래쪽에 연변TV방송국의송신탑이 서 있다.그러나 지난 1991년 몇몇 한국인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선구자탑은 1년도 채 안돼 민족주의의 발호를 우려한 중국당국에 의해 철거돼 기단만 흉한 몰골로 남아 있다. 비암산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용정은 산지에 둘러싸인 분지모양이다.서북쪽 평강령 틈새를 간신히 비집고 나온 해란강이 큰 물줄기로 바뀌면서도시 한가운데로 흘러간다.선구자가 말달리던 강변을 따라 연길과 함께 중국조선족의 양대 중심도시로 성장한 용정의 주택가가 길다랗게 형성돼 있다.용두레우물터는 용정시내 한복판 용정중학부근 삼거리 한켠에 조그만 가로공원으로 단장돼 남아 있다. 
「룡정지명기원지우물」이라는 한글이 씌어진 높이2가량의 석탑옆에 이곳의 유래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1880년경 조선이민 장인석·박인언이 우물을 처음 발견해 우물가에 용두레를 세우고 우물이름을 용정이라 했으며 그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용두레는 우물물을 퍼올리는 장치로그 모양이 용머리를 닮았다 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시내 초입 용문교에는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황금색 용장식이 해란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양편을 치장하고 있다. 최근의 건축물이대개 그렇듯 1988년10월에 만들어진 이 다리의 치졸한 모습도 「선구자」가사에 담긴 깊은 뜻과는 거리가 멀다.비암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었다던 저녁종소리 그윽했을 용주사도  터조차  알아볼수 없는 주택가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선구자의 자취는 찾기 힘들다. 용정은 이웃 연길을 뒤쫓는 상업중심지로, 백두산여행길에 반드시 들르는 역사관광지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고있다. 
오랜정체에서 깨어나 아침마다 용문교의 넓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자전거행렬로 메우는 용정사람들은 달라진 시대의 새로운 선구자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 한국일보 94. 8. 30 기사에서 정리.편집

한편, 국민의 애창가곡 '선구자'에는 그후 작곡자, 작사자 모두에게 좋지 않은 시비거리기 생기기도 했다. 표절시비와 작사자의 친일논쟁등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한 기사를 소개한다.


「선구자」 원제목은 「용정의 노래」” 세계일보 96. 11. 27

장렬한 조국 광복의 웅지를 노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전국민의 애창곡으로 손꼽혀온 가곡 「선구자」의 원제목은 「용정의 노래」였으며 가사도 현재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고 중국에 살고 있는 한 조선족 음악가가 주장,관심을 모으고 있다. 가곡 「선구자」와 관련,이같이 주장하고 있는 사람은 해방 때까지 2년여동안 조두남선생과 중국 흑룡강성에서 음악 활동을 했고,윤해영과는 1944년 처음 만난 후 45년 9월부터 한동안 작사가와 작곡가로 함께 일한 바 있는 김종화옹(75·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작사자로 알려진 윤해영은 국내에서 1933년 어느날 하얼빈에 살고 있던 조두남선생을 찾아가 시 한편을 내어놓으며 곡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후에 오겠다던 그는 지금도 소식이 없어 세인들에게는 표연히 사라진 「독립군」 쯤으로 인식돼 있다가 91년 이후 변절한 친일 시인이라는 주장이 나와 이 노래의 무분별한 방송 연주에 제동이 걸려왔다. 그러나 김옹의 술회 내용이 맞다면, 윤해영은 현재 불리고 있는 「선구자」의 가사를 쓴 적이 없고,애수에 젖은 동요 외에 「척토기」 「발해고지」 「해란강」 「오랑캐 고개」 「낙토만주」 등의 친일시를 썼기 때문에 「변절」 운운할 필요가 없는 친일시인이며 「선구자」의 작사자는 따로 있다는 얘기가 된다. 김옹은 「용정의 노래」에는 「선구자」에 나오는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등의 구절은 전혀 없었으며 그 대신 「눈물의 보따리」 「흘러온 신세」 등 유랑민의 서러움이 주조를 이루었다고 회고했다.<북경=연합>

「선구자」의 수난/작사자 윤해영 변절친일시인 밝혀져 “충격”

조국수복의지를 장렬하게 노래한 「선구자」는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온 국민이 사랑하는 국민가곡이다.
행사장이나 술자리에서,심지어 운동권집회에서도 불리는 「선구자」는 그러나 작사자 윤해영의 새로운 면모가 알려지면서 시비에 휘말렸다. 작곡자 조두남의 회고를 통해 비장한 청년독립지사의 이미지로 알려진 윤해영이 일제괴뢰 만주국을 찬양· 합리화하는 글을 쓴 변절친일시인이었다는사실이 당시 사료를 통해 지난 91년 처음 알려진 것이다. 「선구자」가 「낙토만주에서 터를 닦는 선구자」로 바뀐 친일시까지 발견돼 이 노래를 아껴온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주었다.또 최근 연변대 조선어문학과교수 권철씨(65)는 윤해영이 독립운동가가 아닌 시인이었으며 만주국의 친일조직인 협화협회에서 활동했고, 해방후 함북 회녕으로 가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구체적 행적을 밝혀내 오랫동안 가려졌던 베일을 벗겨냈다.이런 이유등으로 이 노래는 지난해 임정선열5위 영결제전때 조가로 선정됐다가 독립운동 유관단체등의 격렬한 반대로 취소됐다.「선구자」는 작곡시기가 10여년 앞선 박태준곡 「님과 함께」의 모작이라는 표절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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