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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식 그 심연

파천 0 805
그 안식 그 심연

일을 마치고 혼자 시내를 배회해 보았더랬습니다. 1월의 남포동 밤거리, 화려하고도 영롱한 불빛들이 명멸하며 팔짱을 낀 선남선녀들이 쌍쌍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습니다. 추위를 뚫고 온갖 아름다운 빛깔로 춤추는 네온의 섭리 안에 계절은 변함없이 냉기를 뿜고 있었으며 포도를 오가는 하이힐의 또각거리는 소리가 겨울을 더 겨울답게 만드는 방점을 찍고 있었습니다. 긴 생머리, 혹은 잔뜩 세운 코트 깃,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아름다운 각선미들, 언제나 보아도 싱그러운 그들의 대열은 번화가의 꽃들이었습니다. 지나가 버린 내 젊음의 시간들도 저 대열에 편승하여 그 자격을 획득했던 기록이 뇌리에서 솟아났습니다. 그렇지, 나에게도 저런 눈부신 시간들이 있었지. 그러나 지금은 그들을 바라보며 그 아득한 세월의 저편을 소회하며 그 기억들을 즐기는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겨울의 거리는 눈물겹습니다.

거울의 거리는 눈물겹습니다. 바람은 불고 가슴은 시려 번화가의 화려함 뒤안에 잠긴 보이지 않는 그 비애도 물밀듯이 솟아납니다. 지금은 밤입니다. 밤이기에 비애는 더 잘 익은 빛깔입니다. 그것은 추억이기도 하며 가 버린 젊음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하며 힘들고 어려웠을 때의 고통이기도 하며 이미 예전에 소멸된 못다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세속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자랑스러운 삶도 아니었으며 세속의 무지한 눈으로 보면 그렇게 못난 삶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삶은 신이 아니기에 언제나 애잔한 반성으로 우리들의 앞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찬 기운이 도저하여 장막처럼 깔려버린 이밤 비애라는 눈물겨운 감성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사랑 그 회억 무지개 같았던 그 젊음은 이제 없습니다. 텅비어버린 시간들, 그 시간들을 거쳐 지나온 흩어져버린 세월들, 그리하여 감회가 거리 전체에 퍼져 공기처럼 가슴에 밀려와도 그냥 호흡할 뿐입니다.

어느 한 시절.
꿈처럼 바람처럼
스쳤던
스치고 지나갔던
그 시간들.
눈물겹도록 비감에 어린
그 비애들.
못다한 사랑의 그 상흔들.
걷고 있네. 따라오고 있네.

포도마다 겨울은 묻어 있었습니다. 골목안 포장마차에서도 뜨거운 김은 피어오르고 쇼윈도에 진열된 아름다운 밍크코트의 털들도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저 걸었습니다. 이 나이에 고독이라든가 낭만이라든가 하는 언어들은 어울리지 않는 개념들이지만 그것들로 몸살을 앓는 자신이 되고도 싶었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가누었던 정신을 다 풀고 싶었습니다. 우수해 보이고자 유능해 보이고자 타를 디디고 세속의 틈에서 가장 잘 솟은 나무가 되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였던 그 억지 그 피로도 모두 풀고 싶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지, 왜 그렇게까지 조이고 또 조였던지.
 
걷다가 들어간 곳이 젊은이들이 들끓는 호프집이었습니다. 젊음들이 그득히 앉아있었습니다. 담소와 웃음소리와 잔이 부딪치는 금속성이 음악처럼 실내에 차 있었습니다. 반백의 머리를 가누며 맥주를 시키는 사람은 나 뿐이었습니다. 이내 거품이 넘치는 눈부신 맥주잔이 탁자에 놓여졌습니다. 잔을 들어 단숨에 반을 비우고는 꽉 차오르는 충만감에 몸을 잠시 떨었습니다. 화끈하도록 자극적이었습니다. 그 옛날 그녀는 나와 팔을 같이 엮어 잔을 비우기를 좋아했습니다. 다 마시고는 웃으며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았습니다. 다알리아처럼 맥주에 익었던 그 붉은 꽃잎, 이제는 내앞에 없어도 그 부드럽고 가는 팔의 감촉을 다시 기억해 냅니다. 따스하고 정감이 넘치던 팔이었습니다. 백설같은 태깔이 눈을 부시게 하던 빛나던 팔이었습니다. 웃으며 속삭이던 그 해맑았던 음빛깔과 긴 생머리의 우미함이 앙상블이 되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정갈했던 그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아름다움은 의도함이 삭제된 페이지의 순수함이 더 감동적인 법입니다. 백치미에 가까웠던 그녀의 천진함이 이밤따라 못내 기억을 아프게 합니다. 그녀는 훨씬 전부터 이 세상에 거하지 않습니다.
 
맥주 집은 시끌벅적했습니다. 그 와글거리는 젊음의 한 귀퉁이에서 초로의 신사 하나가 조용히 술을 비우는 정경, 어떤 구도인지 나는 알지 못하나 그것도 도회의 한 풍경일 것입니다. 술잔을 앞에다 두고 쳐다보는 세상은 그런대로 쓸만했습니다. 날은 흐르고 계절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이 겨울이 빨리 끝나지 않도록 빌어봅니다. 춥고 삭막하기는 하나 몸서리치도록 아름다운 계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두서도 없이 마신 맥주처럼 이 글도 두서가 없습니다. 그저 써 보고 싶어서 사고를 곧추세우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썼습니다. 나의 누이여! 마음을 다 풀어 버리니 글쓰기도 편하군요. 기승전결의 딱딱한 고리를 무시해도 글은 존재하나 봅니다. 좋은 글을 쓰고자 의도해도 마음을 다 열어놓고 쓰는 글의 효과에 못 미칠 때가 허다합니다. 글은 그대의 입술처럼 감미롭고 매력적인 시간이 찾아왔을 때에 가장 절실하게 표출되나 봅니다. 혹한의 계절 중심에 서서 써 내리는 글에는 한기마저 감돌지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있음에 또 써 내렸습니다. 숙명처럼 언약처럼 글은 쓰지 않으면 호흡이 버거워지는 실체입니다.
 
긴장한 정신, 경직된 마음, 걱정과 불안이 종시 떠나지 않더라도 그냥 무심히 계절을 전송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저 담담히 자신의 내면을 응시해 보면 그 속에는 그래도 작은 위로 한 자락은 숨어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작고도 귀여운 동화 같은 나라에서 온 어린 눈망울이 나를 보고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눈동자만큼이나 초롱초롱한 그 세계 그 안식의 심연에서 솟아나 순결한  솜털처럼 사람들을 감싸는 따스한 훈풍들, 그 훈풍은 혹한이 몰아치는 엄동이라도 불고 있을 것입니다. 몸을 기대고 그 위로의 숨결을 음미하며 시간을 접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이 시간들을 다시 기립시켜 정비하고 닦을 것입니다. (2012.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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