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개에 싸인 하늘 재(포암산)
는개에 싸인 하늘 재 (포암산)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만큼 고개도 많다.
경북 문경시 관음리에서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로 넘어가는 하늘 재(해발525m)는 그리 높지 않으나 그 이름에서는 한없이 높고, 외진 것 같은 느낌이 풍긴다.
함백산 만항 재(1,330m)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로는 휴전선 이남에서는 제일 높다는데 그 외에도 지리산 정령치(1.172m), 계방산 운두령(1.089m), 설악산 한계령(917m), 대관령(832m), 육십령(734m) 등 이보다 높은 재가 수없이 많다.
어느 임금이 신하들의 지혜를 시험하여 우리나라의 가장 높은 고개를 물으니 한 신하가 보릿고개라 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말 사전에 보면 고개는 산이나 언덕의 넘어 오르내리게 된 비탈진 곳이라 하였으며, 재는 길이 나있는 높은 산의 고개(嶺)라 하였으니 재와 고개는 높고 낮음에 따라 붙이는 낱말인 듯하나, 한자인 嶺(령) 峴(현) 峙(치) 가운데 嶺과 峴은 재를 뜻하나 峙는 우뚝 솟을 치자이니 고개라기보다는 봉우리를 뜻하는 듯 한데 우리는 그냥 편리한대로 치를 쓰기도 한다.
어쨌든 나는 하늘 재를 한 번 넘고 싶었다.
여름 장마에 이은 태풍 마니가 일본열도를 거쳐 북상했으나 곳에 따라 비가 내릴 것이라는 제헌절 날 나는 집을 나섰다.
성깔 있는 사람의 성난 얼굴처럼 잔뜩 찌푸린 날씨, 짙은 는개가 차창에 부딪쳐 영롱한 이슬을 맺는다.
미륵사지에 도착한 것이 오전10시 정각, 관광객 몇 사람이 미리 와 구경을 하고 있다.
내 월악산에 오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니 이미 이곳에는 몇 차례 들른바 있으나 올 때마다 신비감은 더해만 간다.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중원미륵리사지, 언제 세웠으며 또 어떤 사유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는 이 절은 석불(보물 제96호)과 5층석탑(보물 제95호)의 조각솜씨와 모양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왕자인 마의태자가 이곳에 머물러 석굴사원을 조성하고 누이 덕주공주가 새긴 덕주사 마애불과 북과 남에서 서로 마주보게 했다는 애절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우수에 차있는 것 같기도 하고 비감에 젖은 듯도 한 석불입상은 천년 세월에 온 몸이 검은 이끼에 덮였어도 그 얼굴만은 지금도 해맑은 흰빛을 띠고 있으니 이 또한 풀리지 않는 신비이다.
가람 터 앞쪽 왼편에 자리한 길이 605센티 높이 180센티의 돌 거북 비석받침(石龜趺)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라는데 일반적으로 창사의 연혁이나 중수기록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비 몸(碑身)을 다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도 찾지 못했다 한다.
빗발이 굵어진다. 나는 우의를 둘러쓰고 준비를 갖추어 역사자연관찰 로를 따라 하늘 재로 향했다.
는개가 연기처럼 스며드는 하늘 높이 치솟은 소나무와 참나무 숲속, 예가 바로 하늘나라 아니랴.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phytoncide)와 테레펜(terpene)은 살균 살충성 물질로 인체에 유익하니 되도록 많이 흡수하기 위해 삼림욕을 해야 한다는 안내문이 반갑기도 하다.
이윽고 하늘 재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문경에서 예까지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문경시가 세운 거대한 유허비에는 이 고갯길은 신라 제8대 아달왕(156년)이 처음 개설하여 계립령(鷄立嶺)이라 하였다는데, 죽령(竹嶺)보다 두 해, 조선 태종 때(1414년) 개설한 조령(鳥嶺)보다는 1,258년이 앞선 것으로, 이 고갯길을 넘어서면 곧 충주에 이르고 충주에서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한강하류까지 일사천리로 갈 수 있어 삼국시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하였다.
여기 서린 전설이 떠오른다.
옛날 어느 선비가 한양에 과거를 보러가다가 젊은 여인이 지아비의 시묘를 하고 있는 움막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여인의 미색에 마음이 움직인 선비가 “이 밤 서로 인연을 맺으면 어떨까(結義此夜因緣)”라 읊어 대구를 요구하니 여인은 “죽은 남편이 황천에서 운다(故夫鼓盆黃泉)”고 답하여 완곡히 거절했다.
선비가 한양에 이르러 또 다른 과부 집에 묵게 되었는데 주안상을 차려들고 들어온 여인이 “結義此夜因緣”하는지라 선비는 “故夫鼓盆黃泉”이라 답했다. 이에 여인이 부끄러워 뒤돌아 나갔다.
이를 엿듣고 있던 한 노인이 선비에게 나타나 홀로된 며느리의 행실을 나도 바로 잡지 못했는데 선비가 글귀 하나로 깨우쳤으니 참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 노인이 바로 과거의 시관이었으니 그 글귀가 시제로 출제되고 그 선비가 장원급제를 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늘 재 고갯마루, 어쩌면 그 시묘움막이 있었던 자리, 허름한 산장에 젊은 부부가 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산길을 묻고는 그냥 뒤돌아섰다.
오름길은 경사도 45도를 넘는 가파른 돌길이다.
이제 욕망도 미움도 근심도 없을 나이지만, 간밤에 내린 비로 쏴쏴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내 마음도 씻기는 듯하다.
포암산(布巖山:962m), 바위가 명주처럼 널려있어 붙여진 이름인가 널찍널찍한 바위 비탈(슬랩)이 트인 구름사이로 시계에 들어온다.
정수리까지 0.3킬로라 표시된 구간이 그리도 힘들고 지루하다.
모나고 날카롭고 비에 젖어 미끄러운 돌길, 조선조 세도가의 머리인들 이리 도도할까.
서둘지 않고 조심스럽게 참아 오른 정수리, 돌무더기 앞에 「白頭大幹 布巖山」이란 외소한 정상석이 서있다.
남으로 하늘 재를 굽어봐도, 북으로 만수봉(983m)을 쳐다봐도, 동으로 문경 시내를, 서로 미륵리를 바라봐도 온통 는개에 가린 잿빛 하늘뿐이다.
내려오는 길, 부녀산악인 네댓 명이 오르며 “아저씨 왜 혼자 내려오세요?” 묻는다. “네 혼자 올랐기 때문에요” 긴장된 순간에도 모두 웃음이 터졌다.
“오 쏠레 미오···”내 핸드폰의 라이브 벨이 산속의 적막을 깨고 울렸다.
나를 미륵리에 내려주고 문경을 거쳐 하늘 재로 온 아내가 약속시간이 넘자 산길로 오르고 있다는 연락이다.
여보! 산길이 위험해 큰일 나요. 어서 내려가 하늘 재에서 기다려요.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발길을 재촉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만큼 고개도 많다.
경북 문경시 관음리에서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로 넘어가는 하늘 재(해발525m)는 그리 높지 않으나 그 이름에서는 한없이 높고, 외진 것 같은 느낌이 풍긴다.
함백산 만항 재(1,330m)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로는 휴전선 이남에서는 제일 높다는데 그 외에도 지리산 정령치(1.172m), 계방산 운두령(1.089m), 설악산 한계령(917m), 대관령(832m), 육십령(734m) 등 이보다 높은 재가 수없이 많다.
어느 임금이 신하들의 지혜를 시험하여 우리나라의 가장 높은 고개를 물으니 한 신하가 보릿고개라 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말 사전에 보면 고개는 산이나 언덕의 넘어 오르내리게 된 비탈진 곳이라 하였으며, 재는 길이 나있는 높은 산의 고개(嶺)라 하였으니 재와 고개는 높고 낮음에 따라 붙이는 낱말인 듯하나, 한자인 嶺(령) 峴(현) 峙(치) 가운데 嶺과 峴은 재를 뜻하나 峙는 우뚝 솟을 치자이니 고개라기보다는 봉우리를 뜻하는 듯 한데 우리는 그냥 편리한대로 치를 쓰기도 한다.
어쨌든 나는 하늘 재를 한 번 넘고 싶었다.
여름 장마에 이은 태풍 마니가 일본열도를 거쳐 북상했으나 곳에 따라 비가 내릴 것이라는 제헌절 날 나는 집을 나섰다.
성깔 있는 사람의 성난 얼굴처럼 잔뜩 찌푸린 날씨, 짙은 는개가 차창에 부딪쳐 영롱한 이슬을 맺는다.
미륵사지에 도착한 것이 오전10시 정각, 관광객 몇 사람이 미리 와 구경을 하고 있다.
내 월악산에 오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니 이미 이곳에는 몇 차례 들른바 있으나 올 때마다 신비감은 더해만 간다.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중원미륵리사지, 언제 세웠으며 또 어떤 사유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는 이 절은 석불(보물 제96호)과 5층석탑(보물 제95호)의 조각솜씨와 모양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왕자인 마의태자가 이곳에 머물러 석굴사원을 조성하고 누이 덕주공주가 새긴 덕주사 마애불과 북과 남에서 서로 마주보게 했다는 애절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우수에 차있는 것 같기도 하고 비감에 젖은 듯도 한 석불입상은 천년 세월에 온 몸이 검은 이끼에 덮였어도 그 얼굴만은 지금도 해맑은 흰빛을 띠고 있으니 이 또한 풀리지 않는 신비이다.
가람 터 앞쪽 왼편에 자리한 길이 605센티 높이 180센티의 돌 거북 비석받침(石龜趺)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라는데 일반적으로 창사의 연혁이나 중수기록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비 몸(碑身)을 다섯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도 찾지 못했다 한다.
빗발이 굵어진다. 나는 우의를 둘러쓰고 준비를 갖추어 역사자연관찰 로를 따라 하늘 재로 향했다.
는개가 연기처럼 스며드는 하늘 높이 치솟은 소나무와 참나무 숲속, 예가 바로 하늘나라 아니랴.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phytoncide)와 테레펜(terpene)은 살균 살충성 물질로 인체에 유익하니 되도록 많이 흡수하기 위해 삼림욕을 해야 한다는 안내문이 반갑기도 하다.
이윽고 하늘 재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문경에서 예까지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문경시가 세운 거대한 유허비에는 이 고갯길은 신라 제8대 아달왕(156년)이 처음 개설하여 계립령(鷄立嶺)이라 하였다는데, 죽령(竹嶺)보다 두 해, 조선 태종 때(1414년) 개설한 조령(鳥嶺)보다는 1,258년이 앞선 것으로, 이 고갯길을 넘어서면 곧 충주에 이르고 충주에서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한강하류까지 일사천리로 갈 수 있어 삼국시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하였다.
여기 서린 전설이 떠오른다.
옛날 어느 선비가 한양에 과거를 보러가다가 젊은 여인이 지아비의 시묘를 하고 있는 움막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여인의 미색에 마음이 움직인 선비가 “이 밤 서로 인연을 맺으면 어떨까(結義此夜因緣)”라 읊어 대구를 요구하니 여인은 “죽은 남편이 황천에서 운다(故夫鼓盆黃泉)”고 답하여 완곡히 거절했다.
선비가 한양에 이르러 또 다른 과부 집에 묵게 되었는데 주안상을 차려들고 들어온 여인이 “結義此夜因緣”하는지라 선비는 “故夫鼓盆黃泉”이라 답했다. 이에 여인이 부끄러워 뒤돌아 나갔다.
이를 엿듣고 있던 한 노인이 선비에게 나타나 홀로된 며느리의 행실을 나도 바로 잡지 못했는데 선비가 글귀 하나로 깨우쳤으니 참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 노인이 바로 과거의 시관이었으니 그 글귀가 시제로 출제되고 그 선비가 장원급제를 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늘 재 고갯마루, 어쩌면 그 시묘움막이 있었던 자리, 허름한 산장에 젊은 부부가 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산길을 묻고는 그냥 뒤돌아섰다.
오름길은 경사도 45도를 넘는 가파른 돌길이다.
이제 욕망도 미움도 근심도 없을 나이지만, 간밤에 내린 비로 쏴쏴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내 마음도 씻기는 듯하다.
포암산(布巖山:962m), 바위가 명주처럼 널려있어 붙여진 이름인가 널찍널찍한 바위 비탈(슬랩)이 트인 구름사이로 시계에 들어온다.
정수리까지 0.3킬로라 표시된 구간이 그리도 힘들고 지루하다.
모나고 날카롭고 비에 젖어 미끄러운 돌길, 조선조 세도가의 머리인들 이리 도도할까.
서둘지 않고 조심스럽게 참아 오른 정수리, 돌무더기 앞에 「白頭大幹 布巖山」이란 외소한 정상석이 서있다.
남으로 하늘 재를 굽어봐도, 북으로 만수봉(983m)을 쳐다봐도, 동으로 문경 시내를, 서로 미륵리를 바라봐도 온통 는개에 가린 잿빛 하늘뿐이다.
내려오는 길, 부녀산악인 네댓 명이 오르며 “아저씨 왜 혼자 내려오세요?” 묻는다. “네 혼자 올랐기 때문에요” 긴장된 순간에도 모두 웃음이 터졌다.
“오 쏠레 미오···”내 핸드폰의 라이브 벨이 산속의 적막을 깨고 울렸다.
나를 미륵리에 내려주고 문경을 거쳐 하늘 재로 온 아내가 약속시간이 넘자 산길로 오르고 있다는 연락이다.
여보! 산길이 위험해 큰일 나요. 어서 내려가 하늘 재에서 기다려요.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발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