幼年의 추석을 그리워 하며
어른들의 추석은 치루어야 할 숙제 같다.
추석을 앞둔 오늘같이 청명한 날, 그 골치 아픈 숙제는 한쪽으로 밀어놓고
어린 시절의 설렘을 추억 속에서 꺼내보고 싶다.
'팔월이라 한가위 달이 밝으면
손을 꼽아 기다린 한가윕니다
풋대추에 햇밤에 하얀 송편을 소복소복 빚는
한가윕니다'
추석이 다가오면 학교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이 노래를 부르면 그때 느끼던 추석에 대한 즐거운 기대와 설렘이 어렴풋이 살아난다.
엄마는 갑사로 한복을 지어 주시고 그 한복에 금박을 물리는 일은 아버지 담당이었다.
다락방엔 금박 드리는 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무늬 모양의 틀이 있어서 다락에 올라가서 놀 때마다 노란 금물로 새 옷에 금박물리는 것을 보고 싶어 어서 명절이 오기를 고대하곤 했다.
저고리의 붉은 끝동과 깃, 고름 그리고 치맛단에 금박을 물린 다음
추석날 새벽쯤 마당 빨랫줄에 널어 이슬을 맞게 해서 곱게 다려 입을 때의
그 기분은 정말이지 날아갈 듯 했었다.
며칠 전부터 음식 장만에 들어간 엄마는 도대체 잠도 안 주무시는 것 같다.
자면서도 졸립기만 한 어린 시절
자다 문득 깨보면 엄마는 여전히 찬방을 들락거리고 계시고
솥뚜껑을 뒤집어놓고 부치는 전의 양은 한도 끝도 없어 보였다.
이렇게 자면서도 졸리운데 엄마는 얼마나 힘들까,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곤 했다.
추석날 아침 차례를 치르고 나면 몇날 며칠 장만한 음식들을
버들고리에 잘 담아서 아버지를 따라 모두 성묘 길에 나선다.
우리를 모두 보내고 설겆이를 마치면 그제야 엄마는 좀 쉴 수 있을 것이다.
동네 뒤쪽으로 빠져나가 산길을 돌아 들판을 지나 밭고랑도 몇 번이나 거쳐
저수지 둑길로 오르며 가는 성묘 길은 어린 걸음에 멀고도 멀었다.
길은 언제나 바람이 세차서 저수지를 지날 때는 수면 위에 자잘하게 곤두선
물살을 보며 금방이라도 물에 빠질 것 같아 무서웠던 기억도 난다.
콩밭과 옥수수 밭을 지날 때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콩 다발도 따고 옥수수도
툭 한 개씩 꺾으며 간다. 가는 길은 바빠서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채근을 하셨다.
"빨리 가자, 늦는다"
멀리 묘지가 보이면 묘지기가 부지런히 마중을 나오곤 했다.
묘지 입구에 이름 없는 어린 애장이 먼저 보인다. 아이들의 무덤은
늘 그렇게 길가에 두는 법이라고 했다.
우리는 꼭 그 무덤 앞에 엄숙한 심정으로 과일을 하나씩 놓고 갔다.
어른들 따라 누렇게 시든 잔디 아래 잠들어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그저 절을 할 뿐, 딱히 그분들 생각은 나지 않지만 성묘를 마치고
음복을 하는 일 만큼은 신나고 즐거웠다.
서늘한 바람 속에 쌉쌀한 가을 풀 냄새를 맡으며 준비해 간 음식을 먹으면
집에서 먹을 때와 달리 더 맛있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왜 엄마는 음식장만만 잔뜩 해주고 같이 안 오는지 궁금했었다.
하긴 제사를 지낼 때도 엄마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여자들은 일만 죽어라 하고 했었다. 옛날엔 다 그랬다.
돌아오는 길에도 바람은 쉬임 없이 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더뎠다.
장난도 치고 콩서리도 하고 들꽃도 꺾으며 한눈을 팔아도 아버지는 나무라지 않으셨다.
추석이면 생각나는 성묘 길의 추억은 늘 바람으로 비롯된다.
천지에 곡식 익어 가는 냄새 가득한 들길을 옷자락을 펄럭이며 아버지 뒤를 따라
졸망졸망 걷던 기억은 빛 바랜 한 폭의 수채화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른이 된 뒤, 추석은 그저 걱정이 앞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되어버렸지만
사실 얼마나 아름다운 명절인가?
추억이라도 떠올려 할 수 있다면 추석을 추석답게 보내고 싶어진다.
아, 그 바람 가득한 들길을 다시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도 눈감으면 그 하늘, 그 들길, 그 냄새, 그 바람이 내게로 온다.
현실이 어떻든 유년의 추석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추억이 있어
나의 추석은 남모르게 풍성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는데 모두의 추석이 무엇으로든 풍성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추석을 앞둔 오늘같이 청명한 날, 그 골치 아픈 숙제는 한쪽으로 밀어놓고
어린 시절의 설렘을 추억 속에서 꺼내보고 싶다.
'팔월이라 한가위 달이 밝으면
손을 꼽아 기다린 한가윕니다
풋대추에 햇밤에 하얀 송편을 소복소복 빚는
한가윕니다'
추석이 다가오면 학교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이 노래를 부르면 그때 느끼던 추석에 대한 즐거운 기대와 설렘이 어렴풋이 살아난다.
엄마는 갑사로 한복을 지어 주시고 그 한복에 금박을 물리는 일은 아버지 담당이었다.
다락방엔 금박 드리는 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무늬 모양의 틀이 있어서 다락에 올라가서 놀 때마다 노란 금물로 새 옷에 금박물리는 것을 보고 싶어 어서 명절이 오기를 고대하곤 했다.
저고리의 붉은 끝동과 깃, 고름 그리고 치맛단에 금박을 물린 다음
추석날 새벽쯤 마당 빨랫줄에 널어 이슬을 맞게 해서 곱게 다려 입을 때의
그 기분은 정말이지 날아갈 듯 했었다.
며칠 전부터 음식 장만에 들어간 엄마는 도대체 잠도 안 주무시는 것 같다.
자면서도 졸립기만 한 어린 시절
자다 문득 깨보면 엄마는 여전히 찬방을 들락거리고 계시고
솥뚜껑을 뒤집어놓고 부치는 전의 양은 한도 끝도 없어 보였다.
이렇게 자면서도 졸리운데 엄마는 얼마나 힘들까,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곤 했다.
추석날 아침 차례를 치르고 나면 몇날 며칠 장만한 음식들을
버들고리에 잘 담아서 아버지를 따라 모두 성묘 길에 나선다.
우리를 모두 보내고 설겆이를 마치면 그제야 엄마는 좀 쉴 수 있을 것이다.
동네 뒤쪽으로 빠져나가 산길을 돌아 들판을 지나 밭고랑도 몇 번이나 거쳐
저수지 둑길로 오르며 가는 성묘 길은 어린 걸음에 멀고도 멀었다.
길은 언제나 바람이 세차서 저수지를 지날 때는 수면 위에 자잘하게 곤두선
물살을 보며 금방이라도 물에 빠질 것 같아 무서웠던 기억도 난다.
콩밭과 옥수수 밭을 지날 때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콩 다발도 따고 옥수수도
툭 한 개씩 꺾으며 간다. 가는 길은 바빠서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채근을 하셨다.
"빨리 가자, 늦는다"
멀리 묘지가 보이면 묘지기가 부지런히 마중을 나오곤 했다.
묘지 입구에 이름 없는 어린 애장이 먼저 보인다. 아이들의 무덤은
늘 그렇게 길가에 두는 법이라고 했다.
우리는 꼭 그 무덤 앞에 엄숙한 심정으로 과일을 하나씩 놓고 갔다.
어른들 따라 누렇게 시든 잔디 아래 잠들어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그저 절을 할 뿐, 딱히 그분들 생각은 나지 않지만 성묘를 마치고
음복을 하는 일 만큼은 신나고 즐거웠다.
서늘한 바람 속에 쌉쌀한 가을 풀 냄새를 맡으며 준비해 간 음식을 먹으면
집에서 먹을 때와 달리 더 맛있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왜 엄마는 음식장만만 잔뜩 해주고 같이 안 오는지 궁금했었다.
하긴 제사를 지낼 때도 엄마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여자들은 일만 죽어라 하고 했었다. 옛날엔 다 그랬다.
돌아오는 길에도 바람은 쉬임 없이 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더뎠다.
장난도 치고 콩서리도 하고 들꽃도 꺾으며 한눈을 팔아도 아버지는 나무라지 않으셨다.
추석이면 생각나는 성묘 길의 추억은 늘 바람으로 비롯된다.
천지에 곡식 익어 가는 냄새 가득한 들길을 옷자락을 펄럭이며 아버지 뒤를 따라
졸망졸망 걷던 기억은 빛 바랜 한 폭의 수채화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른이 된 뒤, 추석은 그저 걱정이 앞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되어버렸지만
사실 얼마나 아름다운 명절인가?
추억이라도 떠올려 할 수 있다면 추석을 추석답게 보내고 싶어진다.
아, 그 바람 가득한 들길을 다시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도 눈감으면 그 하늘, 그 들길, 그 냄새, 그 바람이 내게로 온다.
현실이 어떻든 유년의 추석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추억이 있어
나의 추석은 남모르게 풍성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는데 모두의 추석이 무엇으로든 풍성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