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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비너스를 가르는 심미안

鄭宇東 0 2098
비너스를 가르는 審美眼

ㅡ 세상에는 아름다움이나 미인에 대한 심미안이 다양합니다.
서양에서는 미인의 모델로 아프로디테여신과 헬렌과 클레오파
트라와 시바의 여왕을 4대미인으로 꼽습니다.
중국에서는 양귀비와 서시, 왕소군, 초선을 4대미인이라 합니다.
정통 미술이나 예술문화에서는 밀로의 비너스와 빌덴도르프의
비너스가 있고 오늘날의 다이어트시대에는 흔히들 말하는 킬로
의 비너스와 밀리의 비너스가 있습니다.
또 유머나 농담에서 어미 메추러기가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새끼는 자신의 새끼메추라기라고 주장하듯이 우리들은 저마다
자기의 어머니, 애인, 마누라, 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신의 4대미인으로 치켜세우는 치기를 곧잘 부리곤 한답니다.

ㅡ 중국 최초의 미녀 공작원 서시.
'침어(沈魚) -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더라.' 춘추전국 시기에 월나라의 저라산 기슭의
한 농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광(夷光)입니다.
어릴때 부터 천성이 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항상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하루는 서시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맑은 강물에 비쳤습니다. 이 때 물고기가
물에 비친 아름다운 서시의 모습에 도취되어 헤엄치는 것도 잊어
버리고 구경하다가 점점 강바닥으로 가라 앉았다고 합니다. 그 후
사람들은 서시를 '침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전쟁중에 모국인 월나라가 위기에 처
하자, 서시는 적 국 군왕 부차(夫差)를 유혹 하기 위한 정치적 임
무를 지고 부차의 애첩이 되어 그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중국 역
사상 가장 유명한 미인계의 주인공이 되었습다.

ㅡ 흉노로 시집간 화친의 미녀 사절. 왕소군.
'낙안(落雁) -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조차 잊
은채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서한시대 남군 자귀출신으로 이름은
장(檣)이고 자가 소군입니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하는 조서가 내
려져 전국 각지에서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에 이르렀습니
다. 그 중 하나 역시 왕소군이었는데 그 때의 나이 18세 꽃다운
나이에 후궁이 되었습니다. 황제는 일일히 궁녀들의 신상을 파악
할 수가 없어, 화공(화가)를 시켜 한사람 한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하였는데, 후궁들은 조금이라도 튀게 보이려 화공에게 뇌
물을 바쳐 초상화를 더욱 예쁘게 그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한하여 뇌물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화공이
가 나 왕소군의 초상화를 평범하게 그리고 얼굴 위에 큰 점하나를
찍어버렸다. 그 후 왕소군의 초상을 본 황제는 추하게 그려진 그녀
의 모습에 안중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무려 5년간이나 궁녀 신분으
로 있었습니다. 황제가 뒤늦게 왕소군의 절세미모에 반했지만 황제
가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기에 호한야에게 왕소군을 빼
앗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ㅡ 삼국지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킨 미녀. 초선.
'폐월(閉月) - 초선의 미모에 달도 부끄러워 구름 사이로 숨어 버
리는 구나.' 초선은 중국 4대 미인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이며 미
스터리한 인물로 베일에 쌓여있습니다.
그 중에 왕윤(王允)의 가기(歌妓)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왕윤은 영제때 예주자사에 임명되어 헌제가 즉위하자 다시 사도
에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하
여 정권을 전횡하고 있어 동탁을 제거할 생각으로 미인계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동안 적합한 대상을 찾
지 못해 고심에 빠져있었습니다. 가기 초선은 그러한 왕윤의 마음
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항상 정성을 다해 가무를 연출했습니다.
왕윤은 초선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초선은 사정을 알고 성심을 다해 왕윤을 돕겠다는 의사를 표시했
습니다. 그녀는 왕윤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여포와 동탁 사이를 이간질해 마침내는 여포의 손을 빌어 동탁을
죽이게 합니다.

ㅡ 시아버지 당현종을 홀린 경국지색 양귀비.
'수화(羞花) - 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원래 이름은 옥환(玉環)이고 포주 영락 출신으로 어려서 일찍 아
버지를 여의고 숙부 양립의 집에서 자랐습니다. 가무와 음률에
뛰어났으며 총명하면서 용모가 천하절색이었습니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과 '무혜비'의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로 궁궐에 들어
갔습니다. 당시 양귀비의 나이 17세. 그러던 어느날 현종이 자기
의 며느리인 양귀비의 어여쁜 자태를 본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
던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현종은 양귀비의 모습이 눈앞에 아
른거려 아무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습니다. 현종은 자신의 측신
인 환관 고력사를 불러 이일을 논의했고 고력사는 양귀비의 두
몸종을 매수해 그녀들에게 양귀비의 마음을 흔들도록 하였습니
다. 양귀비 역시 수왕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귀영화에 더 욕심이
많았기에 수왕을 떠나 우선은 화산으로 가서 여도사 생활을 하
다가 다시 현종의 궁으로 왔다. 양태진이란 이름은 바로 양귀비
가 여도사 생활을 할때 얻은 호이다. 이때 현종은 아들
수왕에게 다소 미안했는지 위씨 성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배려했다. 현종은 자기 품으로 돌아온 양귀비를 위해 궁궐을 마련
하고 그것을 태진궁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
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양귀비는 공식으로 황후 책봉을
받은 적이 없으나 천보 4년에 '귀비'에 책봉된 이후 이미 고인이
되고 없는 황후의 위치를 대신하다시피 했습니다.

ㅡ 그리고 등외 미인으로 조비연이 있습니다.
'작장중무(作掌中舞) - 가볍기 그지없어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다.'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날씬한 여인이었습니다.
'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본 이름 조의주(趙宜主) 대신 조비연(趙
飛燕)으로 불립니다. 뛰어난 몸매에 가무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
한 그녀는 한나라 성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까지 됩니다. 한번은
황제가 호수에서 선상연을 베풀었는데 춤을 추던 조비연이 갑자기
분 강풍으로 물에 떨어질 뻔하자 황제가 급히 그녀의 한쪽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춤의 삼매경에 빠진 조비연은 그 상태에서도 춤추
기를 그치지 않아서 조비연은 임금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
고 합니다. 이렇게 임금의 총애를 받은 그녀는 세상에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 세월은 겨우 10년에 불과했습니다. 황제가 죽
자 비연은 탄핵의 대상이 되었고 평인으로 걸식을 하다가 자살로
그 생을 끝맺고 말았습니다.

ㅡ 밀로의 비너스상
높이 204cm. 루브르미술관 소장. 멜로스의 아프로디테(Aphrodite
of Melos)라고도 합니다. 1820년 4월 8일 에게해에 산재하는 키클
라데스 제도의 하나인 밀로스섬(또는 멜로스섬이라고도 한다)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 근방에서 밭을 갈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
어 마침 이 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이것을 입수하여 다음
해 리비에르 후작의 손을 거쳐 루이 18세에게 헌납되어 왕명으로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었습니다.

ㅡ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1908년 오스트리아의 남부 빌렌도르프의
근교에서 고고학자 Josef Szombathy에 의해 발견된 11.1 cm 키의
여자 조각상입니다. 그 지역에서 나지 않는 어란상 석회암으로 만
들어졌으며 석간주로 칠해져 있습니다. 이 비너스상은 사실적이라
기보다는 이상적으로 표현한 여성상입니다.
커다란 유방을 늘어뜨리고, 허리는 매우 굵었으며, 배는 불룩 나와
있고, 지방이 풍부한 엉덩이는 매우 잘 발달해 있고 성기가 강조되
어 있어서, 생식과 출산, 다산의 상징으로 주술적 숭배의 대상이 되
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작은 팔은 가슴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며, 머리는 땋은 머리, 눈, 또는 모자의 일종이라
고 볼 수 있는 것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ㅡ 킬로의 비너스
재치 있는 말과 짓궂은 농담으로 타인의 두려움을 자아냈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막스 레거(Max Reger 1873.3.19~1916.5.11)
가 한번은 엄청나게 뚱뚱한, 어느 여가수를 보고 놀렸습니다.
" 밀로(=> 밀리)의 비너스는 아니지만, 킬로(그램)의 비너스인것
만은 틀림없어!" 하니 여가수는 비너스의 허영 때문에 과체중의
모욕을 참아 내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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