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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 문순득

鄭宇東 0 1988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 문순득

전라도 나주 흑산도중의 작은 섬인 우이섬의
홍어 장사 문순득(文順得, 1777~1847)은
태사도로 홍어 사러 뱃길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거친 풍랑
을 만나 제주의 추자도 근처에서 다시 밀려서 유구국에 표류하
였다가 그곳에서 송환 귀국길에 중국 복건(푸젠)성으로 가다
또 다시 표류되어 필리핀 루손도에 표류하였습니다. 그가 체
류한 동안에 그 나라들(유구국, 필리핀 루손도) 말을 익혀
1805년 1월 8일에 귀국 귀가한 후에 제주에 표류해 온 외국인
들 중 필리핀인의 말을 통역하여 그들을 9년만에 고국으로 돌
려 보내는데 공을 세우고 가선대부(종2품)의 공명첩을 제수받
았습니다.

그는 비록 홍어 장사치였지만 남달리 개명되어 그동안의 표류
과정과 표류국에서의 생활을 잘 기억하였다가 흑산도로 귀양
왔던 다산선생 형제 실학자에게 표류담을 口述하여 표해시말
(漂海始末) 등을 저술하게 하였습니다.
문순득 이전에도 신라 승려 혜초가 인도 천축국으로 가서 불경
을 가져오고, 고구려의 유민 고선지는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서역 공정에 공적을 세웠던 사실이 있지만 말하자면 문순득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인이라 할 수 있고 최초의 민간외
교가라 할 수 있습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해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기
에 해상조건에 따라 자연히 다른 나라에 표류하는 일도 많았지
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표류해 오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표류해 오는 사람들이야 우호적으로 잘 대접하여 고국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구는 우리 연안을 간단없이 노략질하므로 나라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으며 때로는 수도까지 위협하기도 하였습니다.

대마도와 유구국이 일본의 영토가 되기전에는 이 두 섬은 우리
나라와 정치적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구국은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우리와의 무역거래에
크게 의존하여 부족한 물산을 조달하여 가며 살았습니다.
고대의 나라들은 이방의 표류민이 오면 친절히 도와주며 여러
경로를 통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흑산도의 홍어 장수 문순득은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가지고 돌
아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의 추자도 근처에까지 떠밀려 갔다
가 거기서 다시 거친 풍랑을 만나 오끼나와에 표류하여 그곳에
서 8개월을 체류하며 지내다가 조공선을 타고 중국 복건성으로
보내는 중에 또 풍랑으로 필리핀 루손도(呂宋島)로 표류되어 3
년동안 체류하다 광둥성 상선을 타고 마카오를 경유하여 북경
에 닿아서는 우리나라 사신을 따라 고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습
니다.

귀국 당시 흑산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실학자 손암 정약전은
그의 표류담을 들어 <표해시말>을 짓고,
외국 선박이야기를 들려주어 정약전의 수제자 운곡 이강회가
우리 해양사상 최초의 외국선박논문<운곡선설>을 저술할때
문순득은 자기의 집에 현주서실을 열어 돌보아 주었으며
강진에 유배살던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문순득이
보고 들은 화폐제도등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편입시켰습니다.

유배생활을 살갑게 보살펴 주던 젊은 문순덕에게
다산의 형님 손암선생은 세계최초로 천하 각국을 돌아 보았다
는 뜻으로 초천(初天) 이라는 자(字)를 불러주었고
다산 선생은 초천의 강진방문을 받고 아들을 얻었다는 말에
자진하여 그 이름을 여환(呂還)이라 지어주었다 합니다. 그 먼
여송(呂宋 :루손)섬까지 온갖 고생을 다하며 표류하였다가 기
쁨과 희망을 주며 돌아 온 아버지란 뜻이라 합니다. 
실학파의 대학자와 일개 어부간에 나누어진 인정이 참으로
아름답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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