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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鄭歚)의 금강전도

鄭宇東 0 2006
정선(鄭歚)의 금강전도

며칠전 전형필선생이 세운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간송미술관 2013년 가을전시 眞景時代 畵員展을 관람한 뒷끝에
겸재에 관한 자료를 한번 쯤 훑어 볼 마음이 생겨서 이 글을 씁니다.

간송 전형필 (澗松 全鎣弼 ,1906~1962)은
상속으로 물러 받은 10만석의 巨富를 우리문화재를 수집 소장하는데 쾌
척하고 한남서림을 통하여 한적을 모우고,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를 반입
하는 등 장차 우리 미술사 연구의 요람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
고 당시에는 한적한 교외이던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필요
한 부지를 확보하고(1934년), 1938년 일제의 강력한 물자 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북단장 내에 보화각(葆華閣)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을 설립하여 오늘날의 간송미술관에 이르렀습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은
1676년 아버지 시익(時翊)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의 문하에 드
나들었고, 이들에게서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 받았으며 안동 김씨 명문의
인사들은 그를 후원했고, 정선은 감사의 뜻으로 안동 김문(金門)의 주거
지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려 주었습니다.

정선은 안동 김문의 후원과 더불어 국왕인 영조(英祖, 1694~1776)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영조는 정선보다 18년 연하였지만, 83세까지 장수
하면서 정선과 6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했습니다. 예술에 상당한 조예
를 지니고 있었던 영조가 정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호로만 부를 정
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습니다. 이것은 영조대에 정선이 3차례에
걸쳐 관직을 지낸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또 한편으로 장수한 만년에도 행복한 것은 평생동안 안동 김문의 스승
들의 가르침을 받고, 인생의 반려로 우정을 나눈 담헌 이하곤, 사천 이
병연과 관아재 조영석 같이 詩文 잘하는 지기를 얻었기에 文通과 畵通
속에서 그의 장구한 세월 동안의 예술생활에도 활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의 집안에서는 손자 정황(鄭榥)이 그의 뒤를 이어 화업을 가졌고
그의 제자에는 玄齋 심사정, 不染子 김희겸, 眉山 마성린 등이 있었고
또 겸재는 그림뿐만 아니라 주역에도 능하여 정조때 성리학자로 이름
을 떨친 근재 박윤원이 스스로 겸재에게 주역을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겸재는 이조의 숙종-영조간의 眞景시대의 전성기인 영조시대
의 선비화가로 이른바 진경산수화의 비조이자 남종화의 바탕 위에서
진경산수화법을 완성하였습니다. 겸재의 진경산수는 실경을 즉물적으
로寫生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으로 재해석하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美學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중국 남종산수화의 관념주의를 탈피하
고 寫實주의에 寫意주의를 가미하여 조선 특유의 산수화를 선보였는데
朴淵瀑圖가 그러하였고 仁旺齊色圖와 金剛全圖를 아울러 겸재의 명화
3絶圖라 할 수 있습니다. 겸재는 선면(부채꼴면)에 그리기를 좋아하여
선면 수묵<금강내산> 등이 여러점 있으며, 그가 평생동안 온축해온 주
역의 회화적 해석편이라 할 수 있는 <음양산수화>가 두어쪽 있습니다.

겸재가 가장 득의연하는 회화 소재는 금강산 그림으로
여러 차례 그린 금강전도는 그가 금강산을 탐방한지 오랜후 두번째 벼
슬의 임지 경상도 청하현감으로 있을때 임지에서 20년 전에 탐방하여
그때 마음속에 품어 온 금강산을 그린 이 작품은, 30년후 만년까지 그
려서 최고의 찬사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강산 자연을 사랑한
겸재는 여러 지방의 명승을 그렸지만 한강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서울
을 금강산 다음으로 많이 그렸습니다.

겸재는 그림을 그려 달라면 누구에게나 그려 주었기때문에 다작의 화가
였으며 어느 화가보다도 더 많은 작품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기만성형의 화가였습니다. 장수한 만년에도 원숙한 필치로 많은
명작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만년에는 부유하여 여유있게 친구나 제자들
과 교유하고 인생을 즐겁게 구가하며 다복하게 살았다 합니다.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겸재 정선은, 조선의 화가로서 그를 능가하
는 화가는 그의 앞에도 없고, 그의 뒤에도 없으며 오직 檀園 金弘道만이
유일하게 필적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논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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