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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테마기행

鄭宇東 0 1758
삼국지 테마기행

삼국지를 3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삼국지는 단순한 영웅담의 재미를 넘어 온갖 지략과 전술,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꿰뚫는 인간에의 통찰이 돋보이는 수작입니다.
그래서 "나이들어 안 그래도 이미 노회한 노인은 삼국지를 읽지 말고,
젊기에 안 그래도 혈기가 방장한 젊은이들은 수호지를 읽지 말라"고
하는 처세훈이 대중에 회자할 정도입니다. 그러기에 삼국지를 한번이
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현장을 찾아보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이게 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면 삼국지란 무엇이며 그 줄거리를 대강 알아봅니다.
삼국지란 진수가 지은 역사서로 위,촉,오 이렇게 세 나라가 건국
되서 사마염이 세운 위 계통의 진나라에 멸망하기 까지를 담은
내용입니다. 삼국지연의는 당나라의 나관중이 쓴 책입니다.
지금 내가 전개하는 이야기는 정사 삼국지와 소설적인 픽션이 합
쳐진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삼국이 열리기 전의 이야기는
한나라 말기 환관들이 권력을 전횡하므로 대장군 하진이 토호 세
력들과 손을 잡고 환관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동탁이 세력을
잡았으므로 원소 조조 마등 공손찬 손견은 반동탁 세력으 로 뭉쳤
다가 동탁의 수하 여포가 동탁을 죽이므로 발생한 혼란을 한 헌제
는 조조에게 그 평정을 맡기므로 조조가 원소를 무찌르고 하북지
역을 토대로 제일 먼저 위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
유비가 촉을 세우기 까지는 많은 여정이 있었습니다.
조조에게 패하고 그 밖에 여러 위험을 겪어 마침내 제갈량을 얻어
적벽에서 손씨가문과 동맹을 맺어 조조군을 크게 쳐부수는데 이것
이 바로 赤壁大戰입니다. 이후 남군과 형주를 차지하고 마침내 촉
한을 세웁니다. 그러나 촉한은 위와 오에 비해 세력이 약했습니다.

조조는 여러 인재들과 함께 위를 세웁니다. 조조는 한의 승상이었
기에 기반이 탄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조는 위를 세우기전,
官渡大戰에서 원소의 수십만 대군을 쳐부수기도 했습니다.
오나라는 손권의 형인 손책이 쌓아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영토를
넓힙니다. 유비와 동맹을 맺어 조조도 쳐부쉈습니다. 그러나 촉한
의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손권의 오나라를 침공해 발발한 夷陵大戰과 함께 삼국시대의
흐름을 결정지었던 삼국지 3대전쟁 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 나라
들은 위의 계통을 이은 진의 사마염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 과정과
약간의 소설을 첨가한 것이 삼국지연의입니다.

천하 제패를 꿈꾼 영웅들이 누비던
천혜의 절경을 품고 있는 쓰촨성으로 먼저 가봅니다.
유비는 위의 조조와 오의 손권과 더불어 이 지역에 촉한을 세워
중원을 삼분한 영웅이 됩니다. 새도 넘기 힘들다는 천혜의 요새
‘검문관’, 제갈량의 후계자이자 뛰어난 지략가인 무장 강유의 고
향이며 유비의 시신이 묻혀 있는 ‘유비혜릉’이 남아 있습니다.

‘촉한의 중심, 성도(成都·청두)’는 사천성의 수도입니다.
청두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자 산세가 험해 예로부터
전략적 요지였습니다. 유비와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 ‘무후사(武
侯祠)’, 유비의 시신이 묻혀 있는 유비혜릉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무후사를 끼고 끝없이 펼쳐지는 ‘징리(錦里)풍물거리’에서는
쓰촨 전통의 이색 직업과 볼거리들이 가득합니다. 청두에는 아
직도 촉나라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건물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시내를 거닐다 보면 촉나라를 뜻하는 ‘蜀’이라는 글자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청두 사람들이 그들 도시의 가장 재밌는
관광지로 꼽는 징리(錦里)거리나 일반 가게의 이름에서도 ‘蜀’자
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베이징 경극(京劇)과 쌍벽을 이루는
전통 공연 천극(川劇)을 관람하며 온갖 지략과 전술, 사랑, 배신,
충의와 절개가 살아 숨 쉬는 삼국 영웅들의 대서사시를 만날 수
있습니다.

  * 적벽 대전(赤壁大戰)은 중국의 삼국 시대, 통일을 목표로 세력
을 계속 팽창하던 조조에,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 208년에 후베이
성[湖北省] 자위현[嘉魚縣]의 북동, 양쯔강[揚子江] 남안에 있는
적벽에서 벌어진 큰 전투입니다. 원소(袁紹)를 무찌르고 화북(華
北)을 평정한 조조는 형주목(荊州牧)을 지키고 있는 유표(劉表)를
정복하고 형주땅을 차지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하였습니다.
유표의 급사로 손쉽게 형주를 차지한 조조는 강릉으로 달아나는
유비를 추격하였습니다. 조조군은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
였고 적벽에서 손권·유비 연합군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조군은 손권의 장수 황개(黃蓋)가 화공(火攻) 계략을 세워 전선
(戰 船)이 불타는 대패를 당하고 화북으로 후퇴했습니다.
이 결과 손권의 강남 지배가 확정되고 유비도 형주(荊州:湖南省)
서부에 세력을 얻어 천하 3분의 형세가 확정되었습니다.

 * 관우의 비참한 죽음이 서린 땅 洛陽[뤄양]
관린쓰가 있는 뤄양은 관우의 고향도 아니고, 평생 일했던 곳도
아니고, 죽은 장소도 아닙니다. 게다가 죽어서 시체가 훼손되어
시신 전체도 아니고 일부인 머리만 이곳에 묻혔습니다.
생각하면 아주 비참한 죽음이지만 그 죽음 이후엔 불멸의 명예와
존경을 얻었습니다. 평생 해온 일을 바탕으로 여생을 편하게 보
내는 것도 복된 삶이겠지만, 관우처럼 죽은 지 1793년이 지난 지
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과 추앙을 받는 것도 복된 삶입니다.
이럴 수 있는 인물이 인류 역사에 몇 명이나 될까.

 * 조조의 땅 위나라의 통일 기반 쉬창
쉬창(許昌)은 여행책에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관
심 갖지 않는 곳이지만 왠지 가장 가보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조조 때문에. 조조가 도읍으로 삼아 동북의 원소, 남으로 손
권과 유비를 상대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조가 남긴 것이
있다면 작은 것 하나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실제로
가본 쉬창에는 조조가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도읍으로
서의 지위를 잃어버린 후 잊힌 세월이 너무나 길었던 것일까?
쉬창은 그저 중국 내륙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한적한 도시일 뿐입
니다. 쉬창 버스 역에서 출발해 조조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사실
기념관이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지만 딱히 부를 말이 없습니다.
기념관이라고 부르는데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사소한 것 하나조차 조조가 남긴 것이 아닙니다.

 * 손권의 땅 오나라의 수도 건업
위촉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건국되었으나, 가장 오랫동안 존속
하였고 가장 나중에 멸망하였습니다. 손견(孫堅)과 손책(孫策)의
맹활약으로 강동에 기반을 잡았고, 수성의 달인인 손권(孫權)을
통해 제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마지막 황제인 손호(孫皓)가 서
진(西晉)의 사마염(司馬炎)에게 항복함으로써 삼국 시대도 그 끝
을 맺습니다. 수도 건업(建業)은 동진 시대에 건강(建康)이라고
불리우다 당나라 때는 금릉(金陵)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으며 남경
(南京)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게 된 것은 명나라때 이후의 일입니다.

 * 여포가 탄생한 모래의 땅 네이멍구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지금의 네이멍구자치구[内蒙
古自治區] 구원현(九原縣) 출신이며, 자(字)는 봉선(奉先)입니다.
군웅(群雄) 가운데 무용(武勇)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절개
가 없으며 물욕이 많아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성격이었습니다.
처음엔 정원의 가신이었다가 대장군 하진의 부름으로 십상시의
난을 진압할때 낙양으로 진출하여 정원을 죽이고 동탁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미녀 초선을 사이에 두고 부자가 다투다가 또 동탁
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원소, 원술, 유비, 조조등에 바꾸어 가담
하기를 거듭하다가 나중에 여포는 조조에게 패하여 하비성에서
사로잡혀 처형되었습니다.

 * 제갈공명이 최후를 맞은 땅 오장원
오랜 전쟁터에서 지친 제갈공명은그의 건강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고 마지막 수단으로 하늘에 기도하여 수명을 늘리는 술법을
행하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날, 위
연이 촛대를 쓰러트려, 목숨등이 꺼졌습니다. 이때 강유는 위연
을 죽이겠다고 하나, 제갈량이 말렸고, 강유에게 병법 24편을 전
수해주고 죽습니다. 이때 제갈량이 별에 제(祭)를 올린 곳이라
하여 이름을 양성대(禳星臺)라 부릅니다.

五丈原은 조위(曹魏)의 옹주(擁州) 미국 서쪽에 속했으며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기산현(祁山縣) 남쪽 2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
니다. 제갈공명이 최후를 맞이한 도시로 그의 사당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오장원은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곳입니다. 조그마한
역사 유적도 확대해서 모두 관광지로 만들어버리는 중국에서 다
소 의외였습니다. 마을사람에게 제갈공명의 사당이 어디냐고 묻
자 그걸 보러 찾아오는 사람이 다 있느냐며 신기한 눈으로 쳐다볼
정도입니다. 어렵게 찾아간 사당에 들어서자 제갈공명이 죽을 때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유성이 운석이 되어 자리하고 있었는데, 사
당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제갈공명 사당 중
유일하게 아내 황부인의 조각상도 있는데, 그녀가 제갈공명이 죽
기전 전쟁중에도 수차례 병세를 살피러 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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