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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뚱성(山東省) 지상여행

鄭宇東 0 1699
산뚱성(山東省) 지상여행

중국의 산동성은 중국문화의 꽃이라 할만합니다.
중국인들의 성산 五嶽(泰,華,衡,恒,嵩山)중의 한 좌(座)인 태산(泰山)
이 있고, 여러 강들의 수자원이 풍부하고 기후가 사람 살기에 알맞아
서, 중국 고대 신석기 말기에 흑도(黑陶)를 빚은 용산문화(龍山文化)
의 발원지가 되었습니다. 이 용산문화는 산동성과 남쪽으로 강소성
북부, 북쪽으로 요동 반도와 하북성 당산(唐山) 일대도 분포되어 있
습니다.

산동성은 화산(華山), 태행산(太行山)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얻은 이
름입니다. 춘추전국시대(기원전770~기원전 221년)에 제(齊)나라,
노(魯)나라 2개 제후국이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하여 산동지
역을 齊魯지역이라고도 하며, 현재 산동성의 약칭을 魯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항만을 통해 교역의 중심도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산동성은 일찌기 공자와 맹자를 배출한 곳입니다.
곡부(魯나라 曲阜)에서 성인 孔子가 나서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사이에서 수사학(洙泗學)을 가르쳤고, 현재 곡부에는 대성지성문선
왕(大成至聖文宣王)의 시호를 가진 공자의 사당 孔廟와 살던 집인
孔府, 공자와 그 가족 일문만의 묘지인 孔林이 있습니다.
추현(鄒縣)에서 아성 孟子가 나서 스승의 학문을 널리 전했습니다.
임기에서는 중국 제일의 책사 제갈량이 나서 고장의 이름을 빛냈습
니다. 청도의 영산 라오산에는 기원전에 설립한 대규모의 도교신전
이 있으며, 진시황은 이 산으로 사람을 보내 불로초를 구하려 하였
고 그가 이룩한 통일 국토의 넓이를 낭야성에까지 가서 확인하였고
또한 강태공은 치박에서 낚시하던 유적지가 있고,
세상에 둘도 없는 명필 왕희지와 그 아들이 임기(臨沂)에서 나고
이밖에도 손자, 순자, 묵자, 관포지교의 관중과 포숙아, 삼천갑자동
방삭, 손오공의 출생지, 수호지의 영웅호걸들이 활약한 양산박이 있
고 또 위해에 신라의 교역왕 장보고의 유적 적산법화원 등이 있어
우리역사와도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화교들의 대부분이 이지역으로부터 왔지만
중국에서 산동성은 동이족이 특별히 많이 산 곳이기도 합니니다.
고조선과 부여족 예맥족 숙신족 말갈족 선비족의 거주지였고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도 중국의 동북쪽에 경영되었다는 설이 있
을 정도로 산동반도는 백제의 대륙경영설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공자가 말년에 동쪽으로 건너가 九夷국에 가서 살고싶다 하였고
소동파는 고려국에 나서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 한것이 우리나라
를 마음의 고향으로 그리고 있었던 까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중국 산동성의 登州(현 봉래)는 한(漢)이 고조선을 공격하고,
隋․唐이 고구려를 해상으로 공격할 때 전진기지였던 곳입니다.
발해의 무왕은 732년 대내외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장문휴를
보내어 당의 등주를 습격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평
화를 사랑한 우리나라가 먼저 외국을 침공한 희귀한 선제공격
의 하나이었습니다.

중국 (산동성)의 첫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우리나라 연평도에
들릴 정도로 지근 거리에 있기 때문에 문물의 교류가 왕성하였고
우리 언어에 끼친 영향도 큽니다. 우리 말의 약 70%가 한자말인
데 그중에도 우리의 한자발음에 산동지방의 발음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산동지방에서 再見 >짜이꼔, 健康 >끼엔캉, 金門島 >낀먼따오
그외 곳에서  再見 >짜이젠, 健康 >지엔캉, 金門島 >찐먼따오
이러한 현상은 언어의 발달상 중국어의 입천장 소리되기(口蓋音
化)에로의 진화과정이 덜 된 산동에서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똑 같
이 나타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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