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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親切)과 할복(割腹)

鄭宇東 0 2627
친절(親切)과 할복(割腹)

서비스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관련업종은 물론이고 모든 기업과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일선 공공기관까지 고객서비스 즉 고객만족
(CS : costomer satisfaction)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고객에 대한 친절응대교육으로 끝나는 것으로 여겼지만
근래에는 친절의 덕목을 모든 경영의 이념으로 정착시키기에 이르
렀습니다.

그런데 원래 친절의 어원은 일본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자신의 배를 가르는 비장한 의식인 할복(割腹)과
남에게 상냥한 친절(親切)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650여 년 전 일본 에도막부 시절 각 城을 중심으로
성주들이 세력다툼을 위하여 전쟁을 많이 하였습니다. 거기에서
무사계급인 사무라이들이 전쟁에서 패했을 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고 패전에 대한 책임을 할복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칼(단도)로 자기의 복부를 찔렀을 땐 바로
죽으면 고통이 덜 할 수 있으나 대부분은 엄청난 고통으로 서서히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자신의 심복이나 아
주 절친한 동료가 할복자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긴 칼로 순식간
에 목을 쳐서 고통을 없애주는 행위가 바로 친절이란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하여 할복할 경우에
는 뱃속을 내보인다는 의미에서 배가르기를 깊고 크게하여 내장을
될수록 많이 적출하였으므로 큰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라끼리(割腹) 의식의 현장에는 가이샤꾸닝(介錯人)에
의해서 신세쯔(親切)이 행해져 그야말로 마지막 가는 사람에게
친절이 베풀어진 것이라 하니 상냥하고 다정한 이 "친절"이란 말에
피비린내가 나면서 등골이 오짝하여 지는 무서운 말입니다.

무사의 결백한 성격을 상징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날 무사가 저자 거리를 지나던 중에 자신의 아들이 떡장수와 시
비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상황을 보니, 떡장사는 자신의
아들이 떡을 훔쳐 먹었다고 주장하고, 아들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
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무사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아들의
배를 갈라, 떡이 들어있지 않은 뱃속을 떡장수에게 보여 확인시키고,
즉시 떡장사의 목을 쳤다고 합니다. 셋푸쿠(切腹), 즉 할복자살의 본
래 뜻은 무사의 「명예로운 죽음」으로서 「자신의 뱃속은 깨끗하다.」
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사무라이 문화는 일본인의 의식구조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위와 같은 언어의 이중성의 상징인 다테마에(建て前:밖으로 드러
낸 행위나 겉치레)와 혼네(本音 : 속으로 함축한 마음)의 이중적 구
조와 처세가 단적인 표현이며 그외 친절과 겸손, 많지 않은 욕말...
이런 것들도 오랜 사무라이 시대를 거치며 신중하고 예의바르게 처
신하지 않았다가는 제 명대로 살기 어려운데서 비롯됐습니다. 또 많
은 자살, 장인 정신, 성개방 풍토, 집단-조직주의 등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열거하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일본의 무사 사무라이에게는
키리스테고메(切り捨て御免) 즉 농민이나 상공인이 무사에 대하여
무례를 범했을 때, 칼로 쳐죽여도 상관없다는 불문률과
허리에 칼을 차고 성씨를 가지는 특권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행동
으로 임무가 주어지면 목숨걸고 해내야 했으며 특히 '겐무 시키모
쿠(建武式目)'라는 무사의 생활규정이 있어 모범적인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권리도 컸지만, 의무도 그에 못지 않아 사무라이에겐 자
연히 많은 고뇌가 따랐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심취하게 된 것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불교의 禪이었습니다. 실제로 일찍 죽지 않고
나이가 든 사무라이들은 절에 들어가 승려로 일생을 마친 경우도
많아서 그들의 또 다른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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