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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의 지명

鄭宇東 0 1876
경상도의 지명

이 지명은 경주와 상주에서 연원한 이름입니다.
1896년 경상남도와 북도가 분리되기 전 두 지역을 합하여 부르던 옛 이름
으로 조선 초기까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던 경주·상주·안동·진주
가운데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온 지명입니다.

 * 경주 최부자댁
경주 교동 69번지에는 12대(代), 400년간 지속된 부(富)를 지켜온 집안이
있습니다. 富不三代요 權不十年이란 옛말이 무색하기로서니 경주 최부자
집안은 부자의 덕을 쌓으면서 400년의 부와 영화를 이어 왔습니다.
경주 최부자의 시작은 최지립 장군이 노령으로 병자호란에서 세운 공로로
하사금을 받고 이조리에 충의당을 지은 것을 3대 최국선이 양동으로 옮겨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서양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맞먹는 
최부자집의 육훈(六訓)과 육연(六然) 덕목은
-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마라.
- 과객(過客)은 후히 대접하라.
-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양동 서백당
경주 손씨 큰 종가로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집입니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이 양동마을의 두 종가 월성 손씨 문중은 書百堂(忍자를 백번 쓰다)의 교
훈을, 이언적으로 시작하는 여강 이씨 문중은 無忝堂(조상에게 욕을 끼치
지 말라)는 교훈을 대대로 전하여 내려오고 있습니다.

 * 대구 달구벌
대구는 금호강과 그 지류인 신천으로 둘러싸인 기름진 들판을 중심으로 일
찍부터 살기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 살면서 이 고장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삼한시대의 대구는 변진 24국 가운데 한 나라로 발전해 왔을 것으로 학계
에서는 보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261년에 달벌성(達伐城)을 쌓았다
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국에 속한 큰 읍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689년 신라의 도읍을 경주에서 달구벌로 옮기려 한 사실과 신라의 오악
(五岳) 가운데 팔공산을 중악(中岳)으로 숭배했던 점 등으로 보아도 그때
당시의 대구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팔공산(八公山)
팔공산은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과 경상북도 영천시 신령면, 군위군 부계
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1,193m이며 1980년 5월 도립공원으로 지정
되었습니다. 산세가 웅장하고 하곡이 깊어 예로부터 동화사(桐華寺)·파계
사(把溪寺)·은해사(銀海寺) 등 유서 깊은 사찰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 산 팔공산 명칭의 유래는
옛날 고려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전투를 벌이다 전세가 왕건에게 크
게 불리하게 돌아가며 결국 지금의 팔공산까지 오게 되었는데 왕건의 신하
8명이 왕건을 피신시키고 적들을 유인하기 위해 작전을 짜고 결사항전을
벌입니다. 특히 왕건의 최측근이자 고려조 최고의 충신 중 한사람인 신숭겸
(申崇謙)이 왕건처럼 분장을 하고 후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하며 견훤은 신숭
겸의 목을 베어 자신의 전차에 걸어두고 도성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 싸움에
서 신숭겸·김락(金樂)·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知謙)·원보(元甫)
등을 포함한 8명의 장수들이 모두 후백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일찌기 이들은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습니다.)
왕건은 매우 애통해 하며 8명의 신하를 공산에 묻었는데 후에 8개의 봉우리
가 되었다고 하며, 왕건은 공산에 8명의 충직한 신하가 잠들었다고 해서 원
래의 이름 공산을 팔공산이라고 부르게 했다 합니다.   

 * 하서리 ㅡ 신라의 박제상이 왕제를 귀국시키러 당시의 도선장인 율포(栗
浦 : 현 경북 경주군 남양면 하서리)에서 떠난후 모래사장에 길게 누워 울었
다하여 그곳 지명을 長沙라고도 하며 재상 부인은 일본이 보이는 치술령에
올라가 기다리다가 지쳐 죽어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고 전해옵니다.

 * 안동 하회마을
조선전기 이후에 형성된 집성으로 조선 전기 이후의 전통적인 가옥과 민간
풍속이 잘 보존되어 있는 풍산 류씨 씨족 집성촌마을입니다.
이 마을에 맨 처음 정착한 류씨는 전서공 류종혜(柳從惠)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과 같은 씨족마을의 기반은 류운룡과 류성룡 형제 때 다져졌습니다.
마을 이름인 ‘하회’는 낙동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
싸고 에둘러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 왜관(倭館)
왜관은 보통명사로서 조선시대에 왕래한 왜인의 숙박이나 접대 등에 관한
일과 이들과의 무역을 도모하기 위해 남해의 개항장과 서울에 설치한 관사
(館舍)를 가리킵니다. 지방에서도 이러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부산포와
대구칠곡에도 설치 되어서 그 이름이 역사적 유물로 남아 있습니다.

 * 봉화(奉化)
봉화군은 산세가 수려하고 선비의 정신이 깃들은 예절의 고장입니다.
인구 4만여명에 1읍 9개면으로 전체면적의 83%가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
대로의 산림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특산물이 많습니
다. 특히,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청량산을 위시한 명산과 국보 및 보물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곳에서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이 출생하였습니다.

 * 진주(晋州)
진주는 예로부터 "조정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진주에 있
다."라고 할 정도로 인재가 많았으며 특히 충신이 많기로 이름난 고장입니다.
고려때 거란군이 침략하자 남쪽으로 몽진하는 왕을 호위하던 중 자신이 볼
모가 되어 거란군을 물러나게 하고 그들의 병영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온갖
회유에도 불구하고 불사이군을 외치며 죽어간 충절신 시랑공 하공진,
은열공 강민첨 장군, 단종조 충절신 충장공 정분, 임진왜란때 진주성대첩을
이룩한 김시민 목사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충절, 구한말
서부경남의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노응규 의병장, 3.1운동 당시 대한독립만
세를 외쳤던 진주민들의 충절정신에 이르기까지 그 혼은 오늘에 이어져 진
주인의 가슴속에는 "충절의 고장" 이라는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 통영(統營)
경상남도 중앙부에 위치한 시로 통영이란 명칭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줄인 말로, 조선 선조 37년 (1604년)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통영의 명칭이 시
작되었습니다. 통제영이 자리잡기 전에는 이곳은 두룡포라 불렸습니다.
이곳 출신의 인물로는 극작가 유치진, 그의 동생인 시인 유치환, 윤이상,
박경리, 전혁림, 김춘수 등 유명한 예술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라 예술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풍광이 뛰어나 별명은 동양의 나폴리, 또는 한국의 나폴리라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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