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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충신 에피소드

鄭宇東 0 1574
중국 충신 에피소드

 * 비간
비간(比干)은 이름이 比이고 干은 봉분지의 이름입니다.
공식적인 문헌상으로 기재된 최초의 충신입니다.
그는 중국 상(商)의 정치인으로서 주왕(紂王)이 폭정을 하자 간언(諫言)하다
살해되었습니다. 미자(微子), 기자(箕子)와 함께 상(商)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三仁)으로 꼽힙니다. 나중에 후손이 주왕실로부터 임(林)씨성을 하사받
아 중국 林씨의 조상이 됩니다.
 
 * 백이 숙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상나라 말기의 형제로, 끝까지 군주에 대한 충성
을 지킨 의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기>의 열전에 의하면 백이와 숙제는 원래 서쪽 변방에 살던 형제로, 변방
의 작은 영지인 고죽군의 후계자였다. 고죽군의 영주인 아버지가 죽자, 이 둘
은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끝까지 영주의 자리에 나서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때 상나라의 서쪽에는 훗날 서주 문왕이 되는 희창이 작은 영주들을 책임지
는 서백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희창이 죽고 그의 아들 희발(서주 무왕)은, 군
대를 모아 상나라에 반역하려 했습니다. 희발의 부하 강태공은 뜻을 같이하는
제후들을 모아 전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간언했습니다.
“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효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신하 국가이다. 어찌 신하
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

이에 희발은 크게 노하여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 했으나, 강태공이 이들은 의
로운 사람들이라 하여 죽음을 면했습니다. 이후 희발은 상나라를 토벌하고
주나라의 무왕이 되었습니다.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가 망한 뒤에도 상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으며, 고죽군 영주로 받는 녹봉 역시 받을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었습니다. 이때 왕미자라는 사람이 수양산
에 찾아와 백이와 숙제를 탓하며,
“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주나라의 고사
리를 먹는 일은 어찌된 일인가. ” 하며 책망하였습니다.
이에 두 사람은 고사리마저 먹지 않았고, 마침내 굶어 죽게 됩니다.

 * 왕안석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중국 장시 성(江西省)에서 태어난
중국 북송의 시인·문필가. 정치가로 자는 개보(介甫)이며, 호는 半山입니다.
1069~76년에 신법(新法)이라는 혁신정책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왕안석은 실용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남부출신의 신법당(新法黨)에 속해 있
었습니다. 이들은 북부출신의 대토지를 소유한 보수적인 구법당(舊法黨)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왕안석은 21세에 진사가 되어 거의 20년 동안 화난
(華南)에서 각급 지방관직을 유능하게 수행했습니다. 벼슬길에 오른 초기에
곧은 성격, 뛰어난 문장력, 탁월한 행정능력으로 정평이 나서 후원자들에 의
해 고위직에 오를 만한 인물로 천거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족문제를 이유로
중앙정부의 직위를 번번이 거절했습니다.

중국에 통일제국이 세워진 이래 전례 없는 규모로 단행된 왕안석의 개혁은 비
록 항상 기대했던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었지만, 백성들의 도덕적인 수준을 향
상시키고 그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며 나가서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
드는 데 본래의 목표가 있었다. 왕안석과 그의 개혁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20세
기까지도 비방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왕안석의 개인적인 단점과 정치적 결
함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로 보수파들이 품었던 맹렬한 반감 때문이었다.

 * 해서(海瑞, 1514~1582)
해서는 명나라 광동(廣東) 경산(瓊山, 海南島) 사람입니다.
자는 여현(汝賢)이고, 자호는 강봉(剛蜂)이며 회족(回族 )출신입니다.
가정(嘉靖) 28년(1549) 거인(擧人)으로 뽑혀 관로에 들어섰다. 처음 남평교
유(南平敎諭)가 되었다가 순안지현(淳安知縣)으로 승진했습니다. 검소하게
절약하며 살아 늙은 종에게 농사를 짓게 해 자급했습니다.
 
호부주사(戶部主事)로 옮겼는데, 당시 세종(世宗, 嘉靖帝)이 재초(齋醮)에
몰두하여 정치를 돌보지 않자 글을 올려 실정을 직간했습니다. 미리 관을 사
두고 가족들과도 이별을 할 정도로 죽음을 각오한 상소였습니다. 이 때문에
옥에 갇혔지만 가정제가 그의 준비 과정을 듣고는 감동하며 크게 탄식했습
니다. 가정제가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석방되었습니다. 융경(隆慶)
3년(1569) 응천순무(應天巡撫)가 되어 적극 개혁에 나섰습니다. 오송강
(吳淞江)과 백묘당(白茆塘)을 준설해서 물길이 바다로 빠지게 했고, 이로 말
미암아 주민들의 생활이 편리해졌습니다.

빈민의 전답이 유력자에게 들어간 것을 모두 빼앗아 돌려주었습니다.
만력(萬曆) 초에 장거정(張居正)이 정권을 잡자 그의 강직함을 꺼려 여러 사
람이 추천했지만 끝내 쓰지 않았습니다. 13년(1585) 장거정이 죽자 불려 관
직에 나가 남경우첨도어사(南京右僉都御史)와 남경이부우시랑(南京吏部右
侍郞)에 이르렀습니다. 두해 뒤 병으로 죽었습니다. 시호는 충개(忠介)입니
다. 저서에 <해강봉집(海剛蜂集)>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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