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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왕 에피소드

鄭宇東 0 1625
중국 제왕 에피소드

 * 요 순 우 탕
우리는 중국 역사에서 고대의 태평성세를 요순우탕의 시절에서 찾습니다.
중국 고대에서 역사시대 이전 전설과 신화의 시대로 3황 5제를 거론합니다.
이들중 3황이란 太昊 伏羲씨, 炎帝 神農씨, 黃帝 軒轅씨를 말하고
5제란 소호(少昊), 전욱(顓頊),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을 말합
니다. 이들은 아직 참고할 책이 없는 시대에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여 임금
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 주 周公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이며 주(周 : BC 1111경~255) 초기에 국가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공자는 그를 후세의 중국 황제들과 대신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인물로 격찬했습니다.
주공은 주를 창건한 문왕(文王:姬昌)의 아들이고, 무왕(武王:姬發)의 동생
으로 무왕의 권력 강화를 도왔습니다. 무왕이 죽자 직접 왕권을 장악하라
는 주변의 유혹을 뿌리치고 대신 무왕의 어린 아들 성왕(成王)을 보좌하였
습니다. 그러나 주공이 섭정직에 오르자마자 그의 세 동생 관(管)·채(蔡)·
곽(霍)과 몰락한 은(殷)의 후계자 무경(武庚)이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
났습니다. 그는 반란을 진압했으며 또한 몇 차례의 정벌에 나서 황허강(黃
河)유역의 화베이(華北) 평원 대부분을 주의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그리
고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뤄양(洛陽) 근처에 제국의 동쪽 지역을 관할하
기 위한하여 동도(東都)를 세웠습니다.

그는 은이 통치하던 지역에 대한 은의 지배를 완전히 뿌리뽑고, 정복한 지
역에 새로운 행정단위인 대봉건제(大封建制)를 실시해 믿을 만한 주의 관
리들이 이 지역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7년 동안 섭정한 후 스스로 자신의
지위에서 물러날 때쯤에는 주의 정치·사회 제도가 중국 북부 전역에 걸쳐
확고히 수립되었습니다. 그가 확립한 행정조직은 후대 중국 왕조들의 모
범이 되었습니다. 공자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주공을 대단히 숭배하여 한
때는 "오랫동안 주공을 꿈에서 보지 못한 것을 보니 정말로 내가 허약해지
고 늙은 것 같다"고 자책하였습니다.

 * 춘추-전국시대
춘추전국시대란 동주시대(東周時代)의 다른 이름입니다.
BC 770~476년은 공자가 편찬한 노(魯)나라의 편년체 사서 <춘추 春秋>
의 이름을 따서 춘추시대라 하고, BC 475~221년은 대국들이 패자의 자리
를 놓고 다투었으므로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합니다.
춘추시대에 군소 200여 읍제국가가 난립하는 가운데도 제(齊) 환공(桓公)‧
진(晉) 문공(文公)‧초(楚) 장왕(莊王)‧오(吳) 왕 합려(闔閭)‧월(越) 왕
구천(句踐)을 가리키는 春秋5覇가 세력을 떨쳤고,
전쟁으로 점철되었던 전국시대를거쳐 秦 楚 韓 魏 趙 燕 濟의 "戰國7雄"으
로 통합되고 그중에서 秦과 楚가 가장 세력을 떨쳤습니다.

 * 진 시황제
중국에서 “중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역사인물은 누구인가?” 
이런 설문을 해보면 거의 언제나 진시황과 마오쩌둥 두 사람이 1, 2위를 다
툽니다. 마오쩌둥은 오늘날의 사회주의 중국을 만들었고, 진시황은 그 중국
자체를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진 시황은 성은 영(贏), 이름은 정(政)입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으나, 통일제국 진은 그가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했습
니다. 그는 중국 북서부에 위치한, 전국시대 진나라의 군주인 장양왕(莊襄
王)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장양왕은 조(趙)나라에 볼모로 붙들려 있
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이었습니다.
여불위는 경제적인 이익과 권력을 위해 장양왕을 재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정은 13세이던 BC 246년 재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진은 가장 강력한 나라였고, 중국의 나머지 나라를 지배하에 두려고
했습니다. 중원의 국가들은 진을 야만국으로 여겨 멸시했지만 산지로 이
루어진 서부 변방에서의 강력한 위치 때문에 진은 법가, 즉 전체주의적인
국가 철학을 바탕으로 강력한 관료체제를 갖춘 정부와 군사조직을 발전시
킬 수 있었습니다. 옛 봉건적 질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유가와 황제와의
끊임없는 논쟁은 213년 분서갱유 (焚書坑儒) 사건에서 그 절정에 달했습
니다. 분서갱유는 시황제가 이사(李斯)의 제안을 받아들여 의학·점술·농경
에 관한 책과 진나라의 역사기록 및 황실도서관에 있던 책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진시황제의 가장 큰 업적은 분열된 중국의 하나로의 통합이라고 하겠습니다.
정치적으로 군현제라는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를 마련하고, 경제적으로는 도
량형, 화폐, 물가 등을 통일하여 물자의 유통을 국가가 완전히 장악, 통제하
였습니다. 그리고 대규모의 도로를 정비하고 새로이 장성을 쌓는 등 대규모
토목건축사업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엄격하고 가혹한 법률을 만들어 진나라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도 법가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다른 이념과 종교는 불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 한-초 시대
漢나라는 기원전 206년에 고조(高祖) 유방(劉邦, BC 247~195)이
세운 왕조로서 서기 9년에 왕망(王莽)이 정변을 일으켜 신(新)나라를 건립
할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25년에 한나라 왕조의 후예인
유수(劉秀)가 新을 무너뜨리고 다시 한나라를 건립했으니, 그가 광무제(光
武帝)입니다. 역사에서는 전자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 후자를 후한
(後漢, 또는 동한(東漢))으로 구분한다. 후한은 서기 220년에 마지막 황제
인 헌제(獻帝)가 강압에 의해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에게 제위를 물
려줌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조비는 이후 나라 이름을 위(魏)로 바
꾸었고, 사후에 문제(文帝)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습니다.

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항우(項羽, BC 232~BC 202)는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과 진나
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하기 위해 다툰 무장으로 진나라가 혼란에 빠
지자 봉기하여 진군을 도처에서 무찌르고 관중으로 들어갔다. 진을 멸망시
킨 뒤 서초 패왕이라 칭했으나 해하에서 한왕 유방에게 패배하자 자살했습
니다. 패왕별희는 항우가 그의 애첩 우희(虞姬)와 작별하는 이야기입니다.
 
 * 위-촉-오 삼국시대
중국의 후한 멸망 후, 조조의 위(魏)ㆍ유비의 촉(蜀)ㆍ손건의 오(吳) 3국이
분립하여 대립한 시대(220~280)입니다.
중국 역사상 위는 화북(華北), 촉은 서천(西川), 오는 강남(江南)에 할거해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촉은 위에게 멸망되었고, 위와 오는 진에게 멸망하
였습니다. 삼국의 분립은 진ㆍ한이 구축한 고대 통일국가를 붕괴시켰고,
이후 중국은 6세기 말의 수ㆍ당의 통일기까지 긴 분열시대로 접어들었다.

 * 진(晉)
진나라는 진왕(晉王 시호 武皇帝) 사마염(司馬炎, 236~290)이
265년에 위나라 원제(元帝) 조환(曹奐)을 몰아내고 세운 왕조로서 낙양
(洛陽)에 도읍을 두었습니다. 280년에는 동오(東吳)를 멸망시키고 삼국
(三國)을 통일했으나 37년 후인 316년에 한국(漢國, 전조(前趙))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317년에 황실의 후예인 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
276~323)가 건강(建康, 지금의 쟝쑤(江蘇) 난징(南京)에서 진(晉) 왕조
를 다시 세웠는데, 이것을 '동진(東晉)'이라고 부릅니다.

 * 수 양제(隋 煬帝) 양광(569 ~ 618)
수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604-618). 이름은 양광(楊廣)이고, 연호는 대업
(大業)이며, 수나라 제1대 문제의 둘째 아들이다. 600년 권신 양소(楊素)와
결탁해 형 양용(楊勇)을 모함해서 태자의 자리를 빼앗고 604년 아버지의 병
이 중해지자 살해하고 제위에 올랐습니다. 즉위한 뒤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수축했고, 낙양(洛陽)에 동경(東京)을 조영했으며,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
(大運河)를 완성하는 등 큰 토목공사를 자주 벌였고, 서원(西苑)을 조성하고
이궁(離宮)을 건설하는 등 백성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공사에는 백만 명 이상의 백성들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또 큰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 자주 전쟁을 일으켰다. 대업(大業) 9년(613년)
고구려 제2차 침공중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으로 철수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폭군만은 아니어서 대업례(大業禮)와 대업율령(大業律令)의 정
비와 대운하의 완성 같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만년에 사치스런 생활
이 더욱 극으로 치달으면서 백성들의 원망은 높아갔고, 전국에서 군웅들이
봉기했습니다. 나중에 신하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습니다.

 * 당 현종과 양귀비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762)는
중국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의 제6대 황제입니다. 별호는 당명황(唐明皇)이
며, 당 예종 이단의 3남으로, 어머니는 숙명황후 유씨입니다.
당 태종 이후, 번영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쇠퇴를 이끌기도 한 황제입니다.

 * 송나라
송나라(宋, 960년~1279년)는 960년 조광윤이 오대십국 시대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개봉(카이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국호는 송(宋)이었으나, 춘추시대의 송, 남북조 시대의 송 등과 구별하기 위
해 황실의 성씨를 따라 조송(趙宋)이라고도 부른다. 통상 1127년 금나라의
확장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 임안(지금의 항저우)에
도읍을 옮긴 것을 남송이라고 불러 구분하였다. 북송·남송 모두 합쳐 송,
송 왕조라고도 한다. 수도는 개봉(開封, 또는 변경), 남쪽으로 옮긴 후 실질
적인 수도는 임안(臨安)이다. 훗날 원나라에게 멸망당합니다.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한 정권이며, 상비 해군을 설치한 최초의 중국 왕조
입니다. 문치주의 국가로 사대부 사명 의식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전의 왕조
들과는 달리 철권폭정을 하지 않고 문화 정치를 폈습니다.
송나라는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
롭던 시기였습니다. 제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
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에게 독점되던 문학, 미술, 음악, 사상 등이 시민사이
에서도 활발하게 발전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 원나라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중국 본토를 중심으
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입니다.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
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
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
었다. 이와 같이 유목제국에 잠재된 근본적인 결함을 극복하려고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
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의 확립을 꾀
하였다.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의 대제국이
되었다.

 * 명나라
한족(漢族)이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지배를 회복
한 한족의 통일왕조(1368∼1644)입니다.
명대(明代)는 중국이 근대화하는 시기와 직접 접속되는 시대로서 중요한 성
장·변혁기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여 왕권이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정치는 안정되고 상공업이 번성하였다. 이러한 번성으로 도시가 번창
하고 문화와 예술이 발달하였다. 하지만 상업의 발달은 부를 균등하게 분배
하지 못했고 관리는 점차 부패하고 토지를 잃은 유민이 속출하여 명나라의
명운이 기울기 시작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몽골족과 왜구의 침입으로 혼란
을 겪었으며 후기에는 만주족이 세운 후금(後金 : 이후 청나라가 됨)이 명나
라를 압박하였습니다. 결국 1643년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16대 277년만에
명나라는 멸망하였습니다.

 * 청나라
중국 대륙의 마지막 왕조로, 기간은 1616년부터 1912년까지이다.
1616년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국을 세우고, 1636년 태종때
국호를 대청으로 개칭하였다. 명나라가 망하는 틈을 타서 중국에 침입,
순치~강희 연간에는 명나라의 유족, 삼번(三蕃)의 난, 대만의 정씨(鄭氏)
등을 평정하고 전국 지배에 성공하였다.

강희 · 옹정 · 건륭의 3대 130여년 간의 전성기에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여러 제도의 정비, 대규모의 편찬 사업을 추진하여 학술을 장려하는 한편
사상 통제에 의한 '문자의 옥'을 치르고 변발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건륭 말기부터 정치가 부패하고 군사력의 근간인 팔기병의 실력이
저하되었다. 또한 사회 모순도 깊어져 백련교의 난 등이 발발하고, 아편전
쟁을 기화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아 반(半)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이로써 점차 혁명 운동이 고양되어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이듬해
선통제(宣統帝)의 퇴위로 멸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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