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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 악녀

鄭宇東 0 3896
중국의 4대 포악녀

 
ㅡ 포악 4악녀 ㅡ

1. 은의 주왕의 달기
자(字) 달(妲). 성(姓) 기(己)입니다. 상(商)나라 유소(有蘇: 지금의 海南 溫縣)
출신으로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비가 되었다고 전해 집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주왕은 학정(虐政)을 간(諫)하는 현신(賢臣)의 말은
듣지 않고 달기의 말만 잘 들었다고 합니다.
주왕과 달기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 죽게 하는 포락(炮烙)의 형을 구경하면서 웃고 즐기거나 돈분
(躉盆)이란 형을 만들어 죄수들을 구덩이에 독사와 전갈을 집어넣고 그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충신 비간(比干)이 죽음을 당한 일도 달기
의 교사(敎唆) 때문이라고 하는데 달기는 주왕에게 자신의 심장병이 나으려면
비간의 심장을 먹어야 한다고 했고 이것을 들은 주왕이 충신 비간을 죽였다
합니다. 또한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말도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
럼 매달아 놓고 즐기던 주왕과 달기의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유흥행위에서 나
왔다고 전해집니다.


2. 전한 고조 유방의 여태후

이름은 여치입니다. 아버지 여공은 고향인 단부에서 비교적 재력을 갖고 있는 사
람이었는데 결혼은 패현 사상의 정장인 유방에게 보내 버립니다. 나이차도 많이
나는데, 초한지에서는 관상을 볼 줄 아는 여치의 아버지가 유방을 보는 순간 세상
의 주인이 될것이란 느낌을 받아 어린 딸을 굳이 유방에게 시집 보냈다고 합니다.
아울러 여공은 여치의 동생 여수를 개백정이었던 번쾌에게 시집 보냅니다. 개백
정이란 신분을 고려할 때 참으로 황당한 짓거리지만, 여공의 짐작은 멋지게 맞아
들어가, 큰 사위는 황제가 되고, 작은 사위는 개국공신의 제2위 재상까지 오르게
됩니다. 다만 훗날 가문이 멸문하게 되지만.
아무튼 여치는 고생을 많이 합니다. 초한전이 시작되자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 유
태공을 모시고 있는 여치와 유방과 여치의 두 아이 혜제(2대황제)와 노원공주를
사로잡아 유방을 압박했습니다. 여치는 늙은 시부모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유
방에게 가랴, 항우에게 잡히랴 온갖 고생을 다합니다.

그러다 황후가 됐으니 사실 눈에 뵈이는게 없었습니다. 여치는 개국 최대의 공
신인 대원수 초왕 한신을 반란케 만들어 그를 척살하고, 역시 개국 공신인 대량
왕 팽월도 모해해 죽게 만듭니다. 여치의 전횡은 태후가 되서 더욱 빛을 발합니
다. 여치는 아들 혜제가 즉위하자, 처음에는 아들 혜제를 위해 황제를 위협할 수
있는 유방의 서자들을 모두 척살합니다. 이 와중에서 초왕 유여의의 모비 척씨
는 두 팔과 다리를 자르고 눈과 귀도 멀게해 변소에 내던져 놓고 인간돼지라고
혜제에게 소개합니다. 이를 본 혜제는 충격을 받아 사망하게 되고, 여치는 혜제
의 아들을 황제로 삼고 자신은 태황태후가 됩니다.

태황태후가 된 다음 여치는 유씨를 하나 둘 척결하게 됩니다. 고조 유방은 죽을
때 "유씨가 아닌 왕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여치는 유씨 성으로 왕에 오른
사람은 모두 척살합니다. 그리고 대신 여씨를 모두 요직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여치는 결국 죽게 되었지만 죽을 때도 10년만 더 살면, 이천하를 여씨의 천하로
만들 수 있을텐데..라고 했답니다.

말 그대로 여치가 죽자, 유씨들은, 여치가 살아있을 땐 여치의 개가 돼서 유씨를
잡아대던 승상 진평과 주발등과 힘을 합쳐 여씨를 몽땅 죽여 없애고 여치가 세운
4대 소제 홍마저 죽여 버리고 문제를 황제로 세웁니다. 결국 여치 일족의 핏줄은
유방의 딸인 노원공주와 그의 자녀밖에 없게됩니다. 여씨를 멸문시킨 게 결국
여치입니다. 심지어 여치는 후한의 황제 광무제에게 황후의 지위마저 박탈당해
시호인 고후마저 뺏기게 됩니다.

다만 여치의 이같은 전횡은 권력층 내부에서만 끝이났다는 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여치가 황태후로 군림하던 시절, 한나라는 매우 위태롭던 시기입니다.
일개 농민 출신이었던 유방이 황제가 되니 그간의 명문세가가 이를 아니꼽게 여
겼고,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부하들. 특히 한신, 팽월, 경포 등 유방의 객장
들은 쉽게 승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여치가 반란을 일으킬 만한 세력을 모두
죽여버리니, 실제 변란은 일어나지 않았고, 외적들도 쳐들어오지 않아 평민들은
오히려 편안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3. 당의 측천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국의 정식 황제가 되는 여자입니다. 이름은 무조로, 아버
지 무사확은 지방 태수 신분으로 그리 미천한 가문은 아닙니다.
그런 무조는 14세가 되던 해 당 2대 황제인 태종의 후궁 무수리로 입궁하게 되었
습니다. 태종은 그녀의 용모가 매우 빼어나 후궁의 마지막 서열인 재인으로 임명
합니다. 다만 무조는 성향이 유비의 후처이면서 유비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손권
의 이복동생 손상향과 유사한 듯 합니다. 예쁜 외모와 달리 활달하고 적극적이고
애교 없는 성격은 전형적인 현모양처인 장손황후를 맞았던 태종 이세민의 눈에
나게 되고, 무조는 이세민의 외면을 받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논란이 되는건 이세민은 뭔가 무조에게 불길한 감을 느껴서 그녀를
멀리했다고도 하고, 무조는 처녀를 이세민에게 바쳤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무조
는 태종이 붕어하자, 곧 전례에 따라 비구니가 되는데 여기서 바로 태종의 아들인
황제 고종과 눈이 맞게 됩니다. 고종 이치를 유혹해 내는데 성공한 무조의 가장
큰 난관은 선제 태종의 후궁이 어떻게 다시 금제의 후궁이 돼 입궁하느냐 이었는
데 무조는 여기서 고종의 황후 왕씨와 고종의 애첩 소숙비 사이의 불화를 이용합
니다. 현모양처 성격이었던 왕황후는 소숙비를 밀어내기 위해 무조의 입궁을 적
극 지원했습니다. 무조는 입궁해서 우선 왕황후의 숙적 소숙비를 폐출시켜 숙의
가 된 다음 모략을 사용합니다. 아이가 없었던 왕황후는 무조가 낳은 여자아이를
매우 예뻐해 자주 보러 무조의 방으로 오곤 했는데 무조는 자신의 딸을 목졸라
죽여놓고 이것을 왕황후에게 뒤집어 씌어버립니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돼 왕황
후는 퇴출, 폐서인이 되고 무조는 황후가 되지만 왕황후의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
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서 왕황후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낀 무조는 결국 왕황
후와 소숙비를 모두 태형으로 죽입니다. 그것도 손과 발을 모두 잘라버리는 잔혹
함을 띕니다. 이 두 여자가 죽는 것이 압권입니다.
전형적인 현모양처 왕황후는 곱게 차려 입은 모습으로 손과 발을 잘리우고,
태형을 당하면서 한마디 신음도 하지않고 맞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소숙비는 우리나라 장희빈이 생각나는 행동을 합니다. 내가 왜 죽어야
하냐고.... 난리를 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자 이렇게 소리지릅니다. "아무야,
쥐로 태어나라, 난 고양이로 태어나 너의 목줄기를 꿰뚫을 것이다" 이 저주는
강철같은 무조의 심정을 뚫은 것 같습니다. 무조는 모든 권력을 잡고 결국 황
제가 된 다음에도 궁내에 고양이를 못기르게 했습니다.

무조의 전횡도 여치와 비슷합니다. 무조 역시 이씨에 충성하는 구신들을 모두
없애고, 이씨 대신 무씨들을 요직에 심습니다. 특히 무조는 자신이 여자고 무씨
라는 이유로 관리들이 업신여길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전국에 암행어사, 파
파라치를 파견해 조금이라도 역모를 꾸미는 관리가 있다면 모두 잡아 숙청해
버립니다. 바로 무서운 흑리의 전횡입니다. 그런 무조는 대단한 정치력의 소유
자였나 봅니다. 무조는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도 명재상으로 칭송받는 적인걸의
보필을 받는데 적인걸만 유일하게 무조에게 개길수 있는 재상이었습니다.
무조는 고종의 아들들을 하나 둘 제거해 결국 자신의 장자 이홍을 황태자로 올
렸습니다. 총명하고 관료들의 신임이 높았던 이홍이 황제가 되면 자신의 권력
이 위태롭게 될 것을 걱정한 무조는 자신의 아들인 이홍을 폐위하고, 사사합니
다. 또 차자 이현이 다음 황태자로 오르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로 어머니에 의
해 폐위되고, 이현은 어머니가 보낸 자객에게 죽게 됩니다.

무조는 다시 3자 이현을 태자로 삼아 중종으로 제위에 올리지만 중종의 아내 즉
며느리 위황후가 자신처럼 세력높은 태후가 되려는 꿈을 꾸고 있음을 알게 되고,
중종을 폐위시킵니다. 그리고 막내 아들 이단을 예종으로 제위에 올렸다가 이
마저 폐위하고 자신이 직접 성신여제가 돼, 주나라란 이름으로 국호도 변경해 버
립니다. 성신여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후계자였습니다. 성신여제는 후계자
를 자신의 조카인 무승사로 할까, 생존한 자식들 중 장자인 중종 이현으로 할까
고민하다 결국 적인걸의 뜻에 의해 중종을 황태자로 삼아 후계 구도를 세웁니다.
그리고 여제는 환관의 도움을 받아 미소년을 침실로 끌어들이는 등 온갖 음란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이런 성신여제의 최후는 그녀가 노쇠함에 따라 옵니다.
적인걸이란 오른 팔을 잃은 여제는 82세가 돼 와병하게 됐고 이 기회에 재상 장
간지는 여제에게 칼을 들이대고 당으로 복귀할 것을 요구하는데 여제는 이를 응
낙하고 자신의 아들 중종을 다시 황제로 세우고 자신은 태상황에 오릅니다. 물
론 국호도 다시 당으로 환원하게 되었습니다. 여제는 죽음에 이르자 중종과 다
른 아들 예종 이단,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막내딸 태평공주를 불러놓고 무씨를
살려 달라고 간청하고 죽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황제가 된 일을 삭제하고, 그저
태후로 남길 원해 그녀의 시호는 그저 측천무후로 남게 됩니다.

측천무후의 치세는 굉장히 안정적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여치의 피바람때 황족
등 고위층만 당했다면 측천시절에는 하위 관료까지 공포에 떨어야 했지만 이로
인해 당 관료들의 청렴도와 도덕성은 크게 올라가게 됩니다. 흑리에게 고발당하
지 않으려면 백성들에게 원성이 나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측천무후의 치세는
권력층에겐 엄청난 시련이었겠지만  백성들에겐 태평성대였습니다. 당시 백성
들사이에는 "황제가 이씨든 무씨든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나"는 말이 유행하
면서 측천의 치세를 즐겼습니다. 악녀가 틀림없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4. 청의 서태후

서태후의 서는 그녀의 성이 아니라 동,서태후란 의미입니다. 그녀는 만주족 고관
의 딸입니다. 정식 시호는 자희태후입니다. 동태후는 정식 시호가 자안태후로,
함풍제의 정실 황후였고, 서태후는 청의 9대 황제 함풍제의 후궁인데 그의 아들
인 동치제가 6세에 황제가 되자 공친왕과 더불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반대파를
일소하고 자신이 동태후와 함께 섭정으로 정권을 잡습니다.
그녀는 아들 동치제 시절 중체서용이란 모토를 내세워 서양의 문물을 배우는 양
무운동을 시작하는데 양무운동에 대한 중국의 자신감은 높았습니다만 서태후는
이 와중에 친정을 하고자하는 아들 동치제와 자리다툼을 벌입니다. 결국 동치제
가 20세의 나이로 천연두에 걸려 죽자, 이번엔 서태후는 그의 여동생의 아들을
11대 제위에 올립니다. 바로 광서제입니다.광서제는 청조 역사상 처음으로 선제
의 혈육이 아닌 방계 출신 황제입니다. 광서제는 8대 도광제의 손자로 제위 계승
권하곤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핏줄을 황제에 올리려는 서태후의 야
망에 의해 황제가 되었습니다.

바로 같은 시기인 우리나라 조선 말기의 철종, 고종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철종과 고종 역시 선왕의 핏줄이 아니지만 철종은 안동김씨 순원왕후, 그리고
고종은 풍양조씨 신정왕후 등 당시 집권 할머니들의 입맛에 따라 옹립된 왕들
입니다. 그런데 확실히 남의 씨는 거두기 어려운 법인지, 광서제가 워낙에 말
을 안듣습니다. 광서제는 이모인 서태후를 매우 싫어했고, 젊은이 답게 새로운
시도를 좋아했습니다. 1894년의 청일전쟁의 패배는 서태후의 생신잔치가 적
쟎은 기여를 했는데 60세 생일을 앞둔 서태후는 이 생일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진상을 받았고, 이때문에 군대로 흘러가야할 돈이 서태후
생일 준비위원회에 들어가, 결국 청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 함대에 캐발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중국측 주장이고, 청이 서태후
생일을  안 벌이고 전쟁 준비했어도 해전에서 일본을 이기긴 어려웠을 겁니다.
양무운동을 하고도 청일 전쟁 졌다는 건 그들의 변명입니다.

결국 광서제는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을 받아들여 1898년 무술변법을 실시합니
다. 이는 서태후의 방해로 좌절됐고, 결국 이후 좌절로 생애를 보내던 광서제는
이모에 대한 엄청난 원망과 저주를 일삼다 1908년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서태후도 따라서 죽습니다. 광서제를 이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
도 서태후가 황제로 만듭니다. 서태후는 약 50년간 동치제, 광서제, 선통제, 세
명의 황제를 결정한 여자입니다. 88년 나온 영화 마지막 황제의 첫 장면이 황제
가 되기 위해 자금성으로 찾아온 3살의 푸이가 누워 있는 할머니 서태후를 보는
장면입니다. 서태후는 푸이에게 자애로운 웃음을 날리다가도, "황제(광서제)가
죽었느냐?"고 물어봅니다. 결국 좌우의 시위가 황제가 죽었다고 말하자 그제서
야 웃으면서 "이제 나도 죽을 수 있겠구나...."하고 이내 숨을 거둡니다.
서태후는 권력욕이 굉장히 강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아들 동치제, 조카 광서
제와 권력 다툼을 했다뿐이지, 이들에게 어떤 위해를 가한 적은 없습니다.
무술변법은 방해했다지만 양무운동은 아들 동치제를 도와 적극 후원했던 그저
수구 보수정치인에 불과합니다. 당시 청이 극도로 어려워져, 백성들이 온갖 고
초를 다겪었지만, 이는 서태후가 무리한 정치를 한 탓은 아니며, 단지 청이 쇠
퇴해가는 시점의 지도자가 서태후였을 뿐이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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