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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요 100년의 음악사 (3)

鄭宇東 0 2301
우리동요 100년의 음악사 (3)

  * 전성시대 ㅡ 1950년대 ㅡ

이시대에 특기할 사항은
이제까지의 가창 위주의 동요마당에 기악을 전공하려는 어
린이들을 위하여 1950년 6.25 전쟁 직전에 서울 청진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백창성(白昌盛)이 <삼흥음악원>을 설립하
여 기악교육을 개인지도한 곳으로 이후 이곳에서 유명 기악
음악인을 많이 배출해 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6.25사변은 다시 남북으로 분단된 채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피난갔던 사람들은 각기 고향을 찾아 돌아갔으나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인명과 재산이 손실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상처가 컸습니다. 실의에 빠지고 울분과 비
통속에서 마음이 거칠어져서 파괴된 건물을 재건하는 일도
시급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하는 일이 더 시급했습니다.
특히 거칠어진 어린이의 마음을 아름답게 순화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시대에 알맞는 새로운 동요가 필요했습니다.
아동문학가, 작곡가, 교육자 여러분의 호응을 얻어 새동요의
제정을 서둘렀는데 KBS의 방송동요가 큰 역할을 맡았습니다.

50년대 중반기의 동요창작은 획기적이어서 수많은 작곡가,
아동문학가가 이때 KBS전파를 통해 의욕적인 창작활동에 참
여하였고, 작품의 창작경향이 한차원 높은 수준급의 동요창작
을 보여 주었습니다. 윤용하의 나무잎배( 박홍근 謠)를 필두로 
한용희, 이계석, 손대업, 김대현의 새로운 동요활동이 한창이
던 그 무렵에 많은 동요곡집(윤석중의 동요 100곡집 등)이 출
판되어 이른바 "동요의 전성기"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특히 1952년 이화여자중학교는 "전국국민학교 동요 콩쿨을
열어 주었고 1954년 KBS는 "방송어린이 음악콩쿠르"를 여는
등 관련외곽단체들의 지원도 두드러지게 많아졌습니다.
1955년 한용희가 지도하는 KBS어린이합창단의 지방순회공연
에 자극되어 이후 지방 곳곳에 어린이합창단이 설립되었고
1956년 윤석중은 어린이문화운동을 펴기 위해 새싹회를 결성
하여 매년 새싹음악회를 열어 새로운 동요운동을 폈습니다. 
1957년에 윤석중 강소천을 비롯한 아동문학가들의 발기로
우리나라 어린이헌장이 제정 곳곳에 이 헌장비를 세웠습니다.

오랫동안 KBS 에서 일하던 곽상수는
1959년경 어린이합창의 발성법을 두성법에 의한 발성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에 대한 시비가 큰 화제가 되었는데 이것은
기존 재래의 흉성법을 뒤엎고 당시의 세계적인 추세인 두성
법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혼란시대 ㅡ 1960년대 ㅡ

1960년대에 들어 이른바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모든
문화적 가치관이 흔들리기 시작하여 동요도 변혁과 혼란의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요의 발전과정에서 볼때
50년대는 동요 창작의 質과 量이 모두 풍요로운 전성시대로
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는데 바로 뒤이어 맞은 60년대가
혼란시대라니 이러한 용어의 이런 사용법이 나에게는 매우
"혼란"스럽게 느껴집니다. 당시의 음악적이고 문학적인
문예인들과 작곡가들의 빛나는 활동으로 보아 나로서는
이 시대를 차라리 "百家爭鳴의 時代"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른바 1960년대 혼란시대의 개막해인 1월에
서울 재동국민학교의 윤형모교장은 동요 작사가와 작곡가
를 초청하여 이들을 위한 사은음악회를 열어 동락하였고
서울시 교육위원회 장학사인 정세문은 일선 교육현장 교사
들로 "서울시 교사합창단"을 조직하고 효률적인 음악교육방
안을 모색하면서 각가지 음악교육행사를 주관 주최하였고
1964년 그동안 밋밋한 단순 동요부르기의 입체화를 위하여
소규모 편성으로 동요 반주를 해오던 KBS앙상블이 대규모
편성의 KBS 교향악단으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국민학교 음악교육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4년에 김공선이, 또 1965년에는 이계석이
대한 교육연합회로부터 특별 공로상을 각각 받았으며
박준식은 1966년 서울교육회장의 공로상을 받았습니다.
 

  * 가치관의 정립 ㅡ 1970년대 ㅡ

어린이 사랑운동과 창작동요 50년을 기념하여
MBC 문화방송은 어린이사랑운동사와 아울러 동요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동요반세기" 라디오특집방송을 마련하였습니다. 
세광 출판사가 그 동안의 애창동요를 수록한 <동요반세기>를
펴내었고, 한용희는 <한국동요 반세기 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1973년 10. 27 " 동요반세기 기념대음악회" 를 이대 대강당에서
열어 어린이와 학부모, 동요 관계자들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상업주의의 도전을 받는 우리의 순수동요가 여러가지 사회환경
에 가려 빛을 잃어가는 가운데 동요의 가치관을 정립하여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대처하는 방어선을 치면서 발전에의 방향
을 모색해야겠다는 시대적 요구가 일어났습니다.
이 70년대 후반에 동요 창작에서부터 합창-합주등의 음악교육
이 넓은 의미의 아동음악으로서 정착 단계에 등어 섰습니다.
또 아동음악을 발전시키고 음악교육의 터전을 굳게 자리하기
위해 수많은 이론서적이 속속 발간되고 있습니다.
 
1977년부터 김공선은 우리나라 아동음악 발전에 공이 많은
교육자 음악가에게 <한국아동음악상>을 매년 시상하고 있
는데 역대 수상자 명단에는 내가 가까이 한 누구보다도 두
드러진 활약상을 보인 이수인선생과 전준선선생과 차주용
교장선생도 거명되어 있어 그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1979년 세계 어린이의 해를 맞아 홍연택이 지휘하는
국립교향악단이 "어린이를 위한 연주회"를 개최하였다는
사실도 특기할 만 합니다.


  * 다양화시대 ㅡ 1980년대 ㅡ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아 이루어진 일련의 음악행사
      가 좋은 반응을 보여 미국으로의 순회공연을 하였고
1983년 MBC 방송에서 매년 창작동요제를 열었고 동요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였습니다.
      이어서 CBS 기독교방송에서도 그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1985년 강원도는 도내 교사를 위한 동요세미나를 열었고
1987년 한국음악협회가 청소년 음악교육 세미나를 열었고
1988년 새싹회가 권길상에게 해외 음악활동 공로로 LA현지
      에서 소파상을 수여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조속에 음악 각계의 의견이 분출하여
성악부문에서는 그들의 참여로 동요의 질과 격을 높였고
제작기획자들은 뮤지컬과 관련시킨 동요 대책을 논의하고
가요계에서의 관심자는 재래식 보수성에서 벗어나 대중사
회에도 어필하는 생활화의 미래상을 논의하는 등등의 동요
의 다양화 요구는 미래의 동요판도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  20세기 말기 10년 ㅡ 1991~1999 ㅡ

이 시기는 동요관계인들이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는 시기이
므로 문외한의 섣부른 예단을 보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동요인 개인적인 업적을 다루지는 않더라도 동요계의
전체 사회적 분위기를 약술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합니다.
1992년 문민 정권으로 바뀌자 각 방송사들의 시청률지상주의
로 건전한 어린이 프로가 점차 줄어들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
하는 개그나 대중가요 랩등 상업방송이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동요인들이 동요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이 중 조직적으로 활동한 파랑새 창작 동요회 등이 1990년에
결성되어 그 활동이 두드러졌습니다.

 
  * 현재와 미래의 동요
 
우리의 동요문화는 지금까지 거의 전부가 서양음악의 토대
와 이론으로 창작되어 왔습니다. 이런 주류 경향 속에서도
국악계의 일각과 국립국악원에서 오랜 역사와 함께 면밀히
내려오는 동요의 역사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국악동요발표회
를 개최하고 순수음악적 기법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음계
와 국악적 기법으로 국악동요를 선보인 것은 매우 창의적이
고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생활환경이 다양하고 생활감정도 다
같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은 어린이에게
도 마찬가지이므로 동요의 창작도 시대에 맞추어야 합니다.
동요 창작 지도에 관계하는 모든 이로 하여금 깊이 연구하고
살펴서 효률성 있는 동요 창작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형식의 모방은 자칫하면 모작성 작품을 낳게되고 개발성 욕구
가 없으면 평범한 습작품밖에 만들지 못합니다.


  * 나오는 말

 역사성과 순수성이 높이 평가되는 동요가
현실적으로 음악성이나 예술성으로 빛을 보기 위해서는 아직
도 요원한 숙제가 있습니다. 선구자들의 헌신적인 개척에 힘입
어 동요의 가치관이 현저하게 높아졌고, 우리 모두가 동요를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생활문화로서의 위치는 확고해졌지
만 오늘의 동요는 창작면에서나 지도 교육한다는 면에서나
개발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사고력에 현대적
감각을 가미하고 거기에 미래지향성의 욕구가 잘 혼합 조화되
어 알찬 새시대의 동요를 창작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음악에 특정 장르들로 벽을 세우지는 맙시다.
동호인들 사이에 가곡을 어린이가 부르면 동요가 되고
또 동요를 성인이 부르면 가곡이 된다는 말에 더하여 성악가가
부르면 예술가곡이 되고 연예계의 가수가 부르면 대중가요가 
된다는 우스개에도 큰 가르침이 있는것 같습니다.

한국가곡의 開祖 난파선생도 클래식을 전공하고 가수가 된 후
배 장건혁(예명 이규남)을 위해서 가요곡을 작곡하였고,
김동진선생도 영화음악을 작곡하고 "백치아다다. 축배의 노래"
등 그 주제가를 가요 버전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어른들과 선배들은 일상 생활속에서 장르야 무엇이든
노래를 부르며 어떠러한 형태로든 한 바탕 카탈시스를 누리기까
지 즐거우면 다 좋다는 주의-주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예술세계의 구현이다고 나는 생각하고 또 그렇게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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