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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모로하시 데쯔지와 대한화사전

鄭宇東 0 2182
諸橋轍次와 大漢和辭典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 1883~1980)는
일본 니가타현의 서당 훈장 집안에서 태어나 한학漢學과
유학儒學을 자연스레 익히며 니가타현 제일사범학교를
거쳐 동경고등사법학교 국어한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19년 문부성 중국철학 문학연구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유학생활을 떠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기를 이루는 계기가 됩니다. 그는 주로 중국의 구학자
들과 교유하여 청조(淸朝) 교감학(校勘學)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당시를 술회하며 “중국 유학시절 하루의 3분의 1
이나 4분의 1을 사전을 뒤지거나 原典들을 감고勘考하는
일이 일상이었는데, 만일 완전한 원전에 의해서 완전한 해
석을 한 사전이 있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중국에 강희자전(康熙字典)은 있으나 숙자:熟字는 없고,
패문운부(佩文韻府)에 성어(成語)는 많으나 해석이 없다.
그러면 내가 한 번 해볼까 하고 막연히 생각한 적이 있다”
라고 말한 것이 훗날 대한화사전 편찬에 대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925년 대수관서점:大修館書店 의
스즈키 잇페이(鈴木一平)로부터 한화사전의 출판 제의를
받고 1929년 작업에 착수하게 되어 1943년 제1권을 완성
합니다. 이 공로로 아사히문화상을 수상합니다.

이 과정 중 교정에 눈을 혹사하여 백내장을 얻었고
1945년에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오른쪽 눈은 완전히 실명하
고 왼쪽 눈은 확대경으로도 작은 글자를 보기 힘든 상태에도
사전 편찬 작업에 매진하여 32년만에 사전을 완성하였습니다.

한학자 모로하시 데쓰지는 서재에서 높게 쌓인 책들과 씨름
하고 있었습니다. 책상 주변에는 그가 휘갈겨 쓴 글자들이 빽
빽하게 채워진 종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습니다.
그는 1928년, 45세에 시작해 17년째 사전을 만드는 일에만
매달려 왔습니다. 그는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바깥 세상에
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귀청을 찢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바깥이 환해
졌습니다. 책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가 놀라서 뛰어나가
보니 집 한 쪽이 무너지고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바로 2차대
전 중이던 그때 공습을 당한 것입니다. 불은 순식간에 그의
서재까지 옮겨 붙었습니다. 그의 눈앞에서 지난 17년 동안의
노력이 몽땅 불에 타 버렸습니다. 수많은 자료와 조판들이 재
로 변한 것을 바라보며 모로하시는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내 사전을 모두 재로 만들었겠다. 하지만 나 모로하시 데쓰지
는 재로 만들 수 없을 거야.’ 하며 그는 다시 사전을 만들 집념
을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그의 굳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한줄기
눈물이 흐르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1960년 드디어 14권짜리 사전이 완성되었습니다.
무려 32년이 걸린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한쪽 눈이 실명하는
불운에도 사전 만드는 일에만 매달리는 모로하시의 정성에 감
복한 대수관 출판사의 스즈키 사장도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
던 아들 셋을 중퇴시키고 함께 간행작업에 매달렸습니다.
 
초판 출판 뒤 전면 수정판을 내는 데 다시 12년이 걸렸고
모로하시가 작고한 뒤에도 증보판을 만드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사전이 바로 《大漢和辭典》으로 한자문화권
최대의 한자 사전입니다. 4만 9천 30자를 수록한 중국 최대의
<강희자전>을 능가하는 5만 3백 54자가 수록돼 있습니다.
한 일(一) 자의 경우 72쪽, 쇠 금(金)은 50쪽에 걸쳐 관련 단어
를 수록할 정도이고, 숙어는 52만 6천여 개나 실려 있습니다.
방대한 어휘도 어휘지만 하나하나에 철저하게 출전을 달아 놓
은 이 사전은 연인원 25만 8천 3백 47명이 동원됐습니다.

그는 매우 온화하면서 굳센 의지를 가진 전형적인 내유외강형
의 인품을 갖추고 있어, 그의 이러한 면모가 방대한 양의 자료
에 대한 각고 어린 탐구와 편찬 작업, 출판사업의 갖가지 난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고된 사전 작업을 가능케 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의 주도면밀한 성격은 전란의 와중에도 불구하고
사전의 문제점과 부족한 점을 꼼꼼하게 적시하게 만들었고,
차후의 수정과 보완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였습니
다. 1960년 전13권으로 !大漢和辭典! 을 완성하여, 문화훈장
을 수상했습니다. 1982년 백수白壽에 이르러서도 광한화사
전을 편찬하고 동년 12월 8일 영면하였습니다.

일본에서 출판된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은
1943년 제1권 출간 당시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표제어로 실린 한자수가 당대 최고인 중국의 康熙字典의
47,000자를 능가하여 5만자에 이르렀고, 분량 또한 전13권
1만 5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엄청난 작업이 모로하시 데쓰지라는 한 학자의 집념에
찬 결실이라는 점에서였습니다. 게다가 이 작업이 한 민간
출판사(大修館書店)가 막대한 경비를 들여 연인원 수만명
을 동원하여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고,

내용적으로도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한어의 용례
는 물론 인용문마다 읽는 방법을 부기했다는 점 역시 당시
로서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한화사전'이 기본적으로 일본어 사용인이 이용하기
에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쓰임과 현대 북경어의 음의 표시 및 용례 그리고 관련 어휘
각 단어의 출전은 물론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총망
라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인에게도 매우 유용한 사전으로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大漢和辭典'이 13권이 완간된 1960년
바로 그해에 이 책이 중국 정부로부터 학술포장을 받은 것도
그것을 입증합니다.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은
현재 수정판 전13권에 어휘 색인 1권과 보권 1권을 더하여
총 15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방대한 분량의 사전이 나오게 된 데에는저자 자신의
초인적인 집념과 노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긴 했지만,
그에 덧붙여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출판을 두 번씩이나 새로
준비하는 등, 이 사업에 자신의 생애와 명예를 걸었던 출판인
스즈키 잇페이(鈴木一平)와 대를 이어 그 일에 헌신한 세 아
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大漢和辭典'이 편찬자와 출판인에게 명예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덧붙여 대외적으로도 이
사전은 한문의 종주국인 중국의'漢語大詞典'과 한국의 '漢韓大
辭典' 등의 간행과 같은 대사업을 착수케 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28년 정식 출판 계약을 한 이후
모로하시 데쓰지는 강희자전을 비롯한 중국의 典籍을 중심
으로 본격적으로 어휘를 수집하고 원전의 용례를 모아 카드
로 작성하기 시작, 1931년에 이르러 이 카드가 40만을 헤아
려 출판사가 계획한 한두 권으로 담을 수 없는 양으로 늘어
났습니다. 그러자 스즈키 잇페이는 규모의 확대를 받아들이
고 이 사전을 세상에 내는 일이라면 자신의 일생을 걸겠노
라고 결의, 사전에 알맞게 정판整版 공장을 따로 설치하고,
필요한 활자를 일류 목판 조각사를 동원, 조각하였습니다.
 
드디어 1941년 마감 단계에 들어가 표제자와 어휘에 일련
번호를 붙이고 최종적인 교정을 행했는데 이 기간에 4명의
조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고 모로하시 데쓰지
도 백내장으로 한 쪽 눈이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1943년 9월 10일 제1권이 간행되자
그 반향은 엄청나 모로하시 데쓰지에게 아사히문화상:朝日
文化賞이 수여되고 책의 예약 또한 3만 부를 넘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2월 25일 동경 대공습으로 조판해놓은 1만
5천 페이지 분의 활자와 어렵게 입수한 용지가 모두 재로
변하는 일이 발생하여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
하였으나 불행 중 다행히 모로하시 데쓰지에게 전권의 교
정쇄 3부가 남아 있어서 재기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후 사전편찬을 재추진하며 스즈키 잇페이는 사
운을 걸고 이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대학 재학 중인 장남과
고등학교 재학 중인 차남을 모두 퇴학시켜 사업에 참여하게
하여 장남은 경영에, 차남은 식자 기술을 익히게 하였습니다.
후에 삼남은 대학 졸업 후 경리 업무를 맡게 했습니다.

또한 목판 인쇄를 위해 사진식자기연구소의
"이시이 모키치"(石井 茂吉)를 일 년간 설득하여 승낙을 얻었고
"이시이 모키치"는 6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맡은 일
의 일관성을 위해 표제자를 모두 혼자서 써내야하는 힘든 일을
하루에 20자씩 8년간에 걸쳐 수행하였습니다. 이 공로로 훗날
서체 개발의 공으로 기쿠치히로시菊池寬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27년의 각고 어린 노력 끝에 1955년 8월 제1권의 인쇄
가 마무리됩니다. 이 때까지 이작업에 종사한 인원이 22만 2천
6백 82명, 비용 또한 당시 물가로 환산하여 약 6억엔을 넘었습
니다. 제1권을 간행하는 출판기념회에서
"모로하시 데쓰지"스스로 장차의 보완계획을 피력하여
1966년~1968년의 축쇄판 발행에서 오식의 정정과 표제자 항
목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본격적인 수정 작업을
위해 대수관서점과 협의하여 1974년에 동양학술연수를 세우
는 데 이르렀습니다.

60년에 완간한 이후 그와 같은 보정 작업을 수행하면서 동시
에 방대한 '대한화사전'이 일반인의 언어 생활에도 적합한 사전
으로 쓰일 수 있도록, 표제자 약 2만 정도의 '광한화사전廣漢和
辭典'을 새로 편집하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광한화사전'이
완결된 것은 1982년 10월로 간행이 되기 바로 직전 12월 8일
영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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