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신요칼럼
신요칼럼
 

우리동요 100년의 음악사 (2)

鄭宇東 0 2167
우리동요 100년의 음악사 (2) 

 * 들어 가는 말

우리나라의 동요는 면면히 이어 온 민족의 숨결이 담겨 있고,
겨레의 애환을 노래해 왔으며, 민족적 시정이 동요에 짙게 깔
려 있어, 동요는 역사성과 순수성에서 우리가 깊이 간직하는
민족적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인들은 동요를 듣고 지난날을 회고하고, 젊은이들은 동요를
부르면서 성숙해 가고, 어린이는 동요를 부르며 동화를 읽으면
서 꿈을 찍는 사진가로 훨 높고 훨 넓게 쑥쑥 성장해 갑니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보는 가운데 수 많은 음악인 문학인, 그리고
교육자들의 애정과 노력이 두드러지게 돋보이며, 이들을 동요
발전의 선각자 또는 선구자로서 높이 기려야 마땅합니다.

  * 민속동요의 전래
우리 나라 역사가 말해 주듯이 옛날 우리 조상들은 문명이 발달
하지 않은 생활환경에서 어렵고 괴로운 일을 수없이 겪으면서
비참한 세월을 보내는 가운데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노래로 달
래며 살아 왔습니다. 그 노래는 한(恨)이 그대로 표출되었습니다.
전래동요의 확실한 기원을 알 수 없으나 상고시대의 龜旨歌에서
시작하여 삼국시대의 향가속의 薯童謠가 있었고 고려시대, 그리
고 조선시대의 불교, 유교의 문화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오늘날에도 기억되고 실연되는 대표적인 몇편을 보면 
술래잡기(충남 천난지방). 강강 수월래(전남 목포지방). 쾌지나 칭
칭(경북 상주지방). 달아 달아 밝은 달아(전국 각지방). 파랑새(전
국 각지방). 까까중(서울지방). 성씨풀이(황해지방)등이 있습니다.
민중의 전승에 의하므로 작사자를 알 수 없고, 가락은 아주 쉽고
단순하기 때문에 어른이나 아이들이 누구나 쉽게 익혀 따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 창가시대
창가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서양음악의 도입과 때를 같이합니다.
19세기 말경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는 한 방법으로 선교사들이
찬송가를 퍼뜨린 것에서 비롯되었다 합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에 서양의 올갠과 피아노가 들어오고
1892년에 우리말로 된 <찬송가 가사집>이 나오고 다음 해인
1983년에<악보 딸린 찬송가>가 발행되었습니다. 찬송가가
널리 보급되자 찬송가 멜러디에 우국충정을 담아서 노래하는
찬송가식 애국창가가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이때 처음 대한
제국의 애국가와 상해 임시정부의 애국가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어서 일본의 침략적 정치공략에 의하여 일본의 창가나 군가
를 퍼뜨리는 군가식 창가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최남선
은 일본철도가를 본따 무려 30여절이나 되는 경부철도가 노랫
말을 썼습니다.

이와 같이 찬송가식 창가와 군가식 창가가 혼용되면서 서양음
악식 곡조에 의한 창가시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마수는 창가식 저항의 노래마저 금하고 일본 소학창가집을
그대로 번안한 <보통교육 창가집>의 발간을 강요하였습니다.
이 당시의 창가란 가사만 우리 것이지 곡조는 외국곡에 붙혀서
부른 것을 극복하고 음악공부를 제대로 한 최초의 작곡자이자
음악교사인 金仁湜이 1912년에 <교과적용 보통창가집>을 손
수 엮어냈고 이어서 대성학교 교사인 이상준이 전래한국 음악
을 처음으로 5선악보로 채보정리하였습니다.

난파의 호로 더 잘 알려진 홍영후는 조선정악전습소에서 바이
올린을 배우는 한편 서양의 명가곡, 민요에 관심을 가지고  그
것을 우리 말로 번역하거나 새로 노랫말을  외국곡에 붙여
창가를 정리하여 1912년에 <통속 창가집>을 엮어 일본아동문
화의 홍수를 경계하였습니다.

  * 개척시대 ㅡ 1920년대 ㅡ
어린이는 나라의 기둥이므로 어린이 사랑이 나라사랑과 겨레사
랑에 직결된다는 신념으로 1921년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엮어
내고 동경 유학지에서 윤극영 조재호 진장섭 손진태 정순철등과
색동회를 조직하고 "어린이"잡지를 내어 어린이 사랑과 창작동요
의 탄생에 전력을 쏟은 소파 방정환은 국내의 천도교등 단체와도
연대하여 1923년 5월 1일에 첫 어린이날 행사를 가졌습니다.
또 윤극영은 최초의 창작동요 <반달>을 1924년에 작곡하고 이어
1926년 최초의 창작동요곡집 <반달>을 출간하고, 또 최초의 노래
단체인 달리아회를 소격동 자택에서 조직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1920년부터 동요작곡에 나선 대구의 박태준은 1925년
오빠생각(최순애 謠), 오뚜기(윤석중 謠. 1927)등을 발표하였습니다.
또 1927년 JODK 경성방송이 첫 라디오 전파를 발사함을 계기로 
그동안 硏樂會를 만들어 젊은이들을 지도하던 홍난파가 < 낮에 나
온 반달. 고향의 봄. 퐁당 퐁당. 달마중...> 등을 작곡하고 1929년에
<조선동요 100곡집>을 등사판으로 내었다가 나중에 옵셑인쇄판으
로 1931년에 그 상권이, 1933년에 그 하권이 나왔습니다.

  * 황금시대 ㅡ 1930년대 ㅡ
1920년대에 개화하여 예술동요로 자리잡아가던 동요는
그뒤 30년대에 화려한 "동요의 세계"를 이루어 가는 중에도
정순철은 <갈닢피리>라는 첫 동요작곡집을 1929년에 펴내었고
같은 색동회 회원인 정인섭. 이헌구는 1930년대 초에 綠陽會라는 
동요동극단체를 만들어 <색동저고리. 백설공주. 에밀레종. 허수
아비...> 등을 동요극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 1914년에 이화유치원을 처음으로 개설한
美. 브라운 여사는 1930년 <유희창가집>을 발간하였고
뒤이어 차사백등이 <표정유희 창가집 1.2.3>을 펴내었습니다.
1932년 윤석중은 <윤석중 동요집> 첫권을 발간하였습니다.
필명이 박영종인 박목월은 1933년에 <통탁탁 통짝짝>을 발표해
서 동요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으며
가곡 <바우고개. 이별의 노래>로 유명한 이흥렬은 1931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고향 원산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3년 서울에
있는 경성 보육학교에서부터 본격적인 동요작곡에 힘썼습니다.
노산 이은상의 노랫말 <꽃동산>에 20곡의 주제음악 동요를 작
곡하여 오늘날에도 애창곡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김성태 => 가을(백남석). 강아지래요(김성도). 방울새(김영일)
                1939년에 <유치원 동요곡집> 엮음
강신명 => <강신명 동요 99곡집. 1932년>. <아동 가요곡선
                300곡집. 1936년>. 숭실대총장 역임
권태호 => 봄나들이(윤석중). 조선 아기의 노래(남궁량).
                눈꽃새(모기윤).
이일래 => <조선동요작곡집. 1938년) 21곡중 산토끼만 불려짐
박태현 => 산바람 강바람(윤석중). 누가 누가 잘하나(목일신).
                물새발자국(김영일)
이밖에도 김대현, 김성도, 유기홍 등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1930년대 이때를 동요의 황금시대라 하는 것은
좋은 동요문학인이 많았고 탁월한 작곡자들이 많은데다가
순수예술동요의 기반을 굳혀주었기 때문입니다.

  * 암흑시대 ㅡ 1940년대 ㅡ
1940년대는 일본의 식민 통치기간중 가장 흉악무도한 정책으로
우리민족을 괴롭혔던 암흑시기였습니다.
이 무렵 일본군대는 만주를 침략한 다음 중국대륙을 침공하더니
1941년에는 미국 영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함으로써
한반도는 전시체제하에 들어갔습니다. 탄압과 고통이  계속되었
고 학교에서나 일상 생활에서나 일본말만 사용하고 일본 노래만
부르도록 강요되어 우리동요는 지하로 숨어버린 원통하고 답답
한 시기였습니다.

  * 해방이후 ㅡ 1945년 전후 ㅡ
기다려 왔던 벅찬 해방으로 이 땅을 침략했던 일본의 통치는 끝
났습니다. 일본의 악랄한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해방을 맞자
갑자기 우리말 우리 노래가 잘 되지 않아 가사의 표현과 감정을
잘 나타낼 수 없었고 어린이들의 노래가 따로 없어서 해방의 기
쁨은 남녀 노소가 다 함께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하는
<조선의 노래> (이은상 詞 / 현제명 曲)를 힘껏 불렀습니다.
얼마 후 어린이를 위하여 애국 동요가 발표되었는데 그것이
<새 나라의 어린이>( 윤석중 謠 / 박태준 曲)입니다. 방송에서
는 조금자 등에 의해서 <노래 공부>시간이 마련되고, 학교에서
는 다시 창가시간이 마련되어 새 노래를 가르쳐 나갔습니다.

해방되던 해 12월, 서울 명륜동에 있는 동소문교회 안에 설립
된 <봉선화 동요회>가 안병원 권길상에 의해 조직되었습니다.
해방 후의 첫 동요지도자의 선두주자로서 새 노래를 가르쳐서
서울 중앙방송국을 통해 매일 방송을 도맡았습니다.
혜화국민학교의 윤정석 교장은 강당에서 학예회를 열었는데
축하객으로 초청된 신익희가 감격하여 말을 못하고 울자
갑자기 학예회장은 그만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일본 곡조로 부르던 졸업식 노래를 버리고 우리의 졸업식
노래를 새로 마련하였습니다. 1946년 8월에 미군정청은
<초등 노래책>을 새로 엮어 음악교과서를 일신하였습니다.
이 국정 음악교과서가 새로 마련됨으로써  많은 음악가들이
동요작곡에 참여하게 됩니다. 기성 동요작곡가들의 작품도
수록되고 새로 김메리의<학교 종>. 김세형의 <도랑물>.
함이영의 <우리나라 꽃>. 손대업의 <얼룩 송아지>. 정동
순의 <강아지>. 나운영의<끼리 끼리 놀자> 등이 새로 교
과서에 수록되었습니다.
중단되었던 어린이 날 행사가 5월5일로 바뀌어 부활하고
각급 사회단체등에서 어린이 이벤트나 프로그램을 확충하
여 국민학교 합창대회등 이린이를 위한 각종행사 열어주고 
윤석중의 집에서 한인현 김천이 지도한 <노래동무회>등에서
새로 작곡된 동요를 가르치며 널리 퍼뜨리기에 힘썼습니다.

윤정석 형모 양모 3형제 교육자
원치호가 지도한 <YMCA 어린이 음악원>
정세문-김순흥이 지도한 <방송 어린이 노래회>
길묘순이 지도한 <은하수 동요회>
한용희가 지도한 <종달새 동요회>

일제 하에서의 동요와 해방직후에 창작된 동요의 성격이 많
이 달라졌습니다. 우울하고 어두운 그늘진 심성을 노래했던
동요가 이제는 밝고 씩씩한 건설적인 노래로 변하였습니다.
노래의 창법도 생동감 있고 경쾌하고 진취성을 띄웠습니다.
동요의 순수성과 예술성이 인정되는 논리가 정립되었고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으로 음악교육의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 전성시대 ㅡ 1950년대 ㅡ
6.25사변은 다시 남북으로 분단된 채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피난갔던 사람들은 각기 고향을 찾아 돌아갔으나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인명과 재산이 손실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상처가 컸습니다. 실의에 빠지고 울분과 비
통속에서 마음이 거칠어져서 파괴된 건물을 재건하는 일도
시급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하는 일이 더 시급했습니다.
특히 거칠어진 어린이의 마음을 아름답게 순화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시대에 알맞는 새로운 동요가 필요했습니다.
아동문학가, 작곡가, 교육자 여러분의 호응을 얻어 새동요의
제정을 서둘렀는데 KBS의 방송동요가 큰 역할을 맡았습니다.

50년대 중반기의 동요창작은 획기적이어서 수많은 작곡가,
아동문학가가 이때 KBS전파를 통해 의욕적인 창작활동에 참
여하였고, 작품의 창작경향이 한차원 높은 수준급의 동요창작
을 보여 주었습니다. 윤용하의 나무잎배( 박홍근 謠)를 필두로 
한용희, 이계석, 손대업, 김대현의 새로운 동요활동이 한창이
던 그 무렵에 많은 동요곡집(윤석중의 동요 100곡집 등)이 출
판되어 이른바 "동요의 전성기"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특히 1952년 이화여자중학교는 "전국국민학교 동요 콩쿨을
열어 주었고 1954년 KBS는 "방송어린이 음악콩쿠르"를 여는
등 관련외곽단체들의 지원도 두드러지게 많아졌습니다.
1959년경 곽상수에 의하여 어린이합창 발성법에 대한 주장이
큰 화두가 되었는데 기존 재래의 흉성법을 뒤엎고 당시의
세계 적인 추세인 두성법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