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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대중화 선구자 테너 엄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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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대중화 선구자 테너 엄정행“은퇴후 무리 안 하니까 40대 목소리로 돌아가더라”

‘국민성악가.’ 테너 엄정행(67) 경희대 음대 명예교수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첫 단어다.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성악가는 많다. 하지만 중장년층에게 가장 대중적이고 친근한 성악가 한 사람만 골라내라고 한다면 호쾌하게 내뿜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아온 테너 엄정행을 꼽지 않을까 싶다.

그가 ‘국민성악가’로 불릴 만한 이유는 또 있다. 지난 40여년 동안 그는 한국인들에게 이탈리아와 독일 가곡, 오페라 아리아와는 또다른 우리 가곡만의 애틋한 정서와 매력을 전해주기 위해 헌신해왔기 때문이다. 한때 TV와 라디오를 틀면 쉽게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엄 교수는 한국 가곡의 대중화를 이끈 대표적인 성악가다. 1968년 첫 독창회를 열고 성악가로 활동한 지 올해로 42년째. “아직도 무대에 서면 늘 긴장된다”는 엄 교수를 3일 만났다.

2007년 갑자기 뇌출혈 증세로 입원해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그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 건강하고 활기 넘쳐 보였다. 그때 일을 계기로 모처럼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데다가, 은퇴 후 학생 레슨이 줄어든 덕분에 “목소리가 40대 한창때로 되돌아갔다”고 말할 만큼 그는 성악가로서 100% 충만된 자신감도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대화는 역시 건강이야기로 시작됐다.

―뇌출혈 증세가 얼마나 심각했던 겁니까.

“너무 무리하게 강행군한 탓이었지요. 수업은 수업대로 하면서 매달 평균 7~8회씩 전국 곳곳에서 공연했으니까요. 부산 공연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는데, 닷새 정도 두통이 계속돼서 감기인 줄 알았어요.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두통이 심해지고 한쪽 눈 아래에 퍼렇게 멍이 들기까지 하더군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병원에 갔더니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이란 진단이 나왔습니다. 입원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걷기와 칫솔질조차 힘들고 말까지 어눌해진 겁니다. 의사는 언어장애가 올 확률이 99%라고 말하기도 했죠. 3일쯤 지나니 좀 나아져서, 3개월 입원하라는 의사 권유에도 불구하고 1주일 만에 퇴원했어요. 그때 이후로 혈압강하제를 먹고 꾸준히 관리해선지 아픈 적은 없습니다.”
―목소리에 변화는 없는지요.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땐 솔직히 걱정이 많이 됐어요. 평생 노래 부르면서 사는 것만 생각했는데 성악을 못하게 되면 정년퇴직후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싶었지요. 아버지가 교직에서 물러나기 2~3년 전, 더 이상 일할 곳이 없어지게 됐다며 고민하셨던 게 비로소 이해됐어요. 퇴원 후 두 달 정도 쉬니까 목소리가 아프기 전보다 건강해지더군요.정년퇴직한 2008년 한 해에만 데뷔 40주년 독창회 등 연주회를 10차례나 했어요. 요즘엔 노래하는 게 예전보다 더 즐겁습니다. 40대때 소리보다 더 좋아졌다는 칭찬까지 듣고 있어요.”
―술을 많이 마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즘은 어떠신지요.

“요즘 소주는 도수가 약한데, 요즘 것으로 서너 병은 마셔야 취기가 오를 정도로 한때는 많이 마셨지요. 하지만 건강문제가 생긴 후엔 막걸리 한 병 정도로 끝내고 있습니다.”
―활동스케줄은 어떻게 됩니까.

“경희대 음대 명예교수로 출강하고 있고, 한 달에 두어번 고향 경남 양산에 가서 ‘엄정행연구소’ 일을 봅니다. 연구소 주최로 성악콩쿠르를 개최해오고 있고, 아마추어 합창단을 육성하고 있으며, 재능 있는 음악도 5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요. 연구소에 방음장치까지 갖추느라 적잖은 비용이 들었는데, 고향에 큰 활력소가 되고 있는 듯해 보람을 느낍니다.”
양산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낸 엄 교수는 음악보다는 스포츠에 푹 빠진 평범한 소년이었다. 음악교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일찌감치 클래식 세계를 접할 수는 있었지만, 성악가가 되리라고는 꿈조차 꿔본 적이 없었다. 장래 희망은 오로지 멋진 배구선수가 되는 것뿐. 배구특기생으로 동래고에 진학했을 정도니 실력이 꽤 좋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생애 첫 좌절은 대학입시를 앞둔 3학년때 닥쳐왔다. 당시 배구 규정이 9인제에서 6인제로 바뀌어 특례입학생 규모가 확 줄어들었던 데다가, 무엇보다 작은 키가 문제였다. 170㎝의 키로는 도저히 특례입학의 가능성이 없었던 것. 아들의 미성을 평소 눈여겨봤던 아버지는 성악을 권유했고, 그때부터 그는 아버지로부터 벼락치기 성악레슨을 받아 결국 경희대 성악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순전히 대학 가기 위해서 성악을 한 셈이네요.

“사실이 그렇습니다.(웃음) 입학하고 나서도 체육관 주변만 기웃거렸지 통 음악에 재미를 못붙였으니까요. 성악가란 목소리 하나만 좋으면 다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외국어도 해야지, 화성악도 공부해야지…. 특히 화성악이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었어요. 그러다 홍진표 교수께서 ‘악기(목소리)가 좋다’며 용기를 주셨지요. 그분이야말로 나의 음악 멘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국내파 성악가인데.

“유학을 가고 싶었지요. 하지만 교사인 아버지 월급으론 어림없었어요. 4학년때부터 방송사 합창단원으로 일하면서 학비를 벌었지요. 대학원 때 결혼해서 약 5년간 공부하는 한편으로 아내와 함께 옷장사, 커피장사, 악기장사를 한 적도 있습니다. 차비가 없을 정도로 힘들 때도 많았고요. 아내가 빌려온 돈으로 혼자 음악회에 간 적도 있어요. 청주여자사범대에 전임강사로 취직한 후부터 생활이 좀 안정됐는데, 워낙 열심히 일한 덕인지 2년 만에 모교인 경희대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지요. 언제 어디서나 열심히 노력하면 기회는 자연스럽게 오는 것 같습니다. 놀면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게 예술입니다. 외국 유학 경험이 없는 만큼, 남들이 1시간 연습할 때 나는 1시간 더 연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지요.”
1972년 FM라디오를 통해 성악곡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당시, 무명의 성악가였던 엄 교수는 작곡가 장일남 선생을 통해 우리 가곡을 녹음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원래는 2~3곡 정도 부를 예정이었는데, 방송사쪽에서 너무나 좋은 반응을 나타내 녹음량이 12곡으로 늘어났다. 그는 방송사에서 얻은 녹음 복사테이프를 직접 들고 음반사로 찾아갔다. 무작정 판을 내고 싶다는 그를 사장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라고. 작곡가, 작사가의 허락을 받고 정부심의필증까지 직접 받아오면 판을 내주겠다는 사장의 말을 믿고 그는 얼마 뒤 도장을 다 받아서 다시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나온 1집 ‘테너 엄정행 한국가곡집’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엄정행이란 이름 석자가 대중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돈은 얼마나 버셨습니까.

“비매품이었어요.”(웃음)
스타 성악가로서 엄 교수의 인생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연주회 때마다 요즘 아이들(idol) 가수 못지않게 팬들이 몰려들었는가 하면 방송가의 인기 초대 손님으로 활동했고, 발표하는 음반마다 히트하기도 했다. 오빠부대도 많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공연장 유리창이 깨진 적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여성팬들이 대기실로 찾아온 적은 없었다”면서 웃었다.

그처럼 높은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엄 교수는 “나는 성악하는 교수이지, 교수 하는 성악가는 아니라는 마음가짐으로 평생 살아왔다”고 강조했다.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가 내놓은 답은 바로 욕심. 교육자로서의 역할보다 성악가로서의 활동에 무게를 더 뒀더라면 욕심이 많아져 순수함을 잃어버렸을 것이란 이야기였다. 돈욕심이 없다 보니, 어디든 그를 원하는 곳이 있으면 출연료에 상관없이 찾아가 공연했다는 것이다.

―가장 잊지 못할 공연을 꼽는다면.

“오래전 강원 태백과 도계에서 했던 공연이오. 영화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정말 열악한 환경이었거든요. 하지만 주민들이 얼마나 뜨겁게 환호하던지. 아무리 허름한 곳일지라도 서울 세종문화회관보다 더 좋은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됐지요. 그 공연으로 인연을 맺었던 분들이 아직도 때가 되면 마늘 등을 보내주십니다. 학교 연구실로 무작정 찾아와서 무릎 꿇고 시골 주민들을 위해 공연해달라고 하셨던 분도 생각나네요. 예전엔 그런 낭만이 있었요.”
―특히 애정이 가는 곡이 있습니까.

“김동진 선생이 작곡한 ‘목련화’요. 경희대 개교 기념 칸타타에 포함된 아리아인데, 김 선생으로부터 직접 친필 악보를 받아서 연습했던 곡입니다. 이 곡을 통해 우리 가곡의 깊이를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좋은 공연장이 많아지고 재능 있는 성악가가 늘었지만, 우리 가곡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어진 듯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사실 외국 가곡보다 한국 가곡을 부르기가 더 어려울 때가 많은데, 우리 것부터 우선 잘해야 외국 것도 잘할 수 있지 않겠어요.”
엄 교수의 희망은 ‘엄정행연구소’ 주최로 2012년 국제콩쿠르를 개최해 새로운 인재를 많이 발굴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공연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 개인적으로는 오는 3월5일 경기 양평군 양수리의 한 사립박물관에서 초청 독창회를 여는 것을 비롯해 8월30일 서울 예술의전당 독창회, 가을쯤 광주 독창회 등 6~7회 연주회 일정이 잡혀 있다.

“음악 덕분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고,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마음만큼은 언제나 부자로 살아왔으니 너무 행복하다”며 그는 정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 = 오애리 문화부장 aeri@munhwa.com" rel="nofollow">aeri@munhwa.com
■엄정행은…음악 교사인 아버지 권유로 성악… 70년대 ‘한국가곡집’으로 유명세
1943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냈고, 부산 동래고를 거쳐 경희대 음대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8년 부산의 한 예식장에서 생애 첫 독창회를 연 후 같은 해 서울 명동국립극장 무대를 통해 성악가로 정식 데뷔했다. 1976년부터 32년 동안 모교에서 후학들을 길러내다가 지난 2008년 정년퇴직, 현재는 명예교수직을 맡고 있다. 2007년 고향 양산에 ‘엄정행연구소’를 설립, 지역사회의 음악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한편 ‘엄정행 콩쿠르’등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오고 있다.

그를 운명적으로 음악의 길로 이끈 첫 ‘멘토’는 양산과 동래에서 한평생 교직자로 사셨던 아버지였다. 성악을 전공한 아버지 덕분에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지방 소도시에서 베토벤, 모차르트 등 온갖 클래식곡들을 축음기로 들으며 성장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 중학교 시절인 1959년 영남예술제에서 성악부 특상을 수상할 정도로 타고난 미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운동에 푹 빠져 체육대 진학을 꿈꿨던 그에게 성악과를 권하며 용기를 줬던 사람도 아버지였다.

성악가로서 자신감을 갖게 해준 멘토는 경희대 은사였던 홍진표(1979년 작고) 교수. 운동에 대한 미련 때문에 좀처럼 음악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던 그를 불러 “너는 악기인 목소리가 좋으니 그거면 됐다”고 격려했던 분이다.

‘비목’의 작곡가인 장일남(2006년 작고) 선생은 엄 교수가 인기 성악가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한 또다른 멘토다. 1970년대 초 무명의 성악가이자 대학강사였던 그에게 생애 첫 음반 녹음의 기회를 줬던 것. 12곡이 수록된 ‘테너 엄정행 한국가곡집’(사진)은 방송가 안팎에서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이름 석자를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했다. 작곡가 김동진(2009년 작고) 선생 역시 엄 교수에게 ‘목련화’란 대표곡을 주신 잊지 못할 멘토다. 엄 교수는 ‘목련화’를 처음 연습할 때 김동진 선생으로부터 “말도 못할 정도로 타박을 많이 받았다”며 웃었다.

오애리 문화부장 aeri@munhwa.com" rel="nofollow">aeri@munhwa.com /[문화일보]|2010-02-05|24면 |03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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