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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시인의「임께서 부르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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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임께서 부르시면」(노래가 된 시:6)
 
◎전북 부안읍 선은리 청구원...파밭을 지나고 사철나무 울타리를 넘어 기와지붕을 얹은 낡은 집 한 채가 현대식 양옥을 배경으로 거느리고 서 있다. 아무리 봐도 낭만적인 시인의 옛집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낡은 옛집을 압도할 듯 서있는 양옥 때문이다. 이리저리 카메라의 방향을 옮기다 포기하는 마음으로 셔터를 누르는 순간,한 사내의 심상치 않은 고함소리가 들린다. 왜 함부로 남의 집을 찍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백배사죄한 뒤 주변을 둘러보니 이 집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84호 신석정 고택임을 알리는 안내판조차 일찌감치 뽑혀서 저만치 팽개쳐져 있다. 문인협회에서 현대문학 표징사업의 일환으로 박아놓은 화강암 돌덩어리는 차마 어쩌지 못했는지 무성한 잡풀 속에 외롭게 앉아 있다. 네모 반듯한 화강암 윗면에 새겨진 이 집의 사연­. 『이 집은 시문학 동인 및 전원시인으로 우리나라 서정시의 큰 맥을 이룬 신석정(본명 석정,1907∼1974)선생께서 시집 「촛불」「슬픈목가」등 대표작을 쓴 집필 산실이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침대에 누워서 /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 조용한 호수 우에는 인제야 저녁안개가 자욱히 나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중에서)

전원적인 목가풍의 시로 30년대 시단에 우뚝 솟았던 신석정 시인. 그는 26세 때 이곳 전북 부안읍 선은리에 초가집을 지어 정원에는 은행,벽오동,목련,산수유,철 쭉,시누대,등나무등을 심어놓고 「청구원」이라 명명한 뒤 주옥같은 시편들을 쏟아냈다. 식민지 치하의 암울한 현실에서 전원에 의탁해 나름의 울분을 삭이며 저항을 모색했던 시인의 땀과 회한이 배어든 현장이다. 시인은 그러나 덧없이 흐른 세월 속에서,경쟁력만을 앞세운 채 정신적 유산은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는 후대의 빈곤한 문화정책 속에서 이토록 쓸쓸하게 홀대받고 있었다.

부안읍 동중리에서 한학자 집안의 3남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신석정은 초등학교 때 수업료를 안 낸 학생을 벌주는 일본인 교사에 항의하는 운동을 주도할 만큼 어린시절부터 정의감이 강했다. 이 때문에 무기정학까지 당했다가 간신히 졸업을 한 그는 한학공부와 초등학교 수학이 학력의 전부이지만 독서편력은 넓고 깊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일찌감치 고향에서 결혼하고 지역 청년들과 더불어 동인지를 내면서 문학수업을 했다. 그동안 틈틈이 중앙의 신문과 잡지에 다양한 필명으로 투고도 한다. 1930년에는 서울에 올라와 조선불교중앙강원에서 공부했지만 자연귀의적 정서에 젖어 있던 시인은 서울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듬해 낙향해 일생동안 고향과 전주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낙향하던 해인 1931년 신석정은 「시문학」지에 「선물」을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이후 1974년 작고하기까지 40여년 동안 첫시집 「촛불」(1939) 이후 「슬픈 목가」(1947),「빙하」(1956),「산의 서곡」(1967),「대바람 소리」(1970) 등 다섯권의 시집을 남겼다. 낙향한 뒤 그의 생활은 청빈한 도연명의 생활을 연상시키는 일면이 있다. 김기림은 그를 두고 「현대문명의 잡답을 멀리 피난한 곳에 한 개의 에덴을 음모하는 목가시인」이라고 평했다. 김기림이 「동경한다」는 표현 대신 「음모한다」는 수사를 동원한 까닭은 신석정이 현실도피의 시인이 아니라 전원 속에서 나름의 울분을 자연으로 포장했음을 에둘러서 지적하려는 의도였다고 후대의 연구자들은 분석하기도 한다. 신석정은 1940년 「차라리 한그루 푸른 대(죽)로」라는 작품을 「문장」지에 보냈다가 검열에 걸려 원고가 되돌아오자 8·15해방까지 붓을 꺾었다.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 대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는 젖어 온 몸이 젖어…』(「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중에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투사들의 애타는 호흡이 바람을 타고 시인의 초가집에까지 날아오고,시인은 청죽 하나를 가슴 깊이 심어두고 식민지의 어둠을 헤쳐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잡히는 시편이다. 신석정의 시작 전반기가 6·25를 기점으로 한 이른바 「청구원 시대」라면 중­후반기는 전주의 「비사벌초사 시대」로 일컬어진다. 6·25를 만나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던 시인은 부안지역에서 인망이 높은 인물로 지목돼 인민군 치하에서 불행하게도 억지춘향의 감투를 쓴다. 식민지의 고난에서 벗어나자마자 닥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이 시인에게 두고두고 멍에를 지우게 된다. 그는 이후 고향인 부안을 떠나 전주로 거처를 옮기고 죽을 때까지 고향을 떠나 살았다.

석양녘의 들판을 다시 가로질러 어두워지는 가을저녁에 찾아든 전주시 남노송동 175의 25번지 비사벌초사 또한 이미 남의 집이었다. 주택가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한옥의 대문을 열고 들어선 40평 남짓의 작은 정원에는 그러나 시인의 체취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2년 전에 이사왔다는 집주인 김남용씨(46·전주 중앙초등학교 교사)는 청구원의 주인과는 달리 시인에 대한 사려 깊은 애정으로 방문객을 환대한다. 어둑신한 정원에 불을 밝히고 올망졸망 모여 있는 수목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한다. 호랑가시나무,태산목,백목련,후박나무,메타세피아,동백,모과나무,사철나무,라일락,남자나무,청목,팔손이나무,산수유,주목,모란,철쭉…. 평생을 자연과 벗하며 그 속에 시심의 뿌리를 내렸던 시인은 답답한 도심에서도 이처럼 마음의 창문 하나 마련했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시누대 대바람소리를 들으며 날아드는 온갖 새들의 노래를 벗삼기도 하고 태산목 꽃이 피면 정다운 사람들을 불러 그 꽃 잎에 술을 부어 마시면서 한없이 호기로운 이야기로 시간을 잊었다.

그는 병상에서도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불러주면 이를 받아 쓰도록 하여 운명하기 며칠 전까지도 시를 지었다. 시인은 와병중에도 『내가 죽거든 무덤 앞에 태산목을 심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청정한 자연에 의탁해 인간사를 노래한 이 시인의 서정적인 시편들은 여러 작곡가들이 「임께서 부르시면」(김재근,한만섭 작곡),「산수도」(임종길),「작은 풍경」(정회갑),「네 눈망울에서는」(정회갑) 등의 노래로 되살려냈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 //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임께서 부르시면」중에서)

원문 : 세계일보(1996-10-27) , 편집 : 내마음의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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