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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극기의 아름다움 - 정회갑의 진달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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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진달래꽃 처럼 세상에 날리 알려진 시도 드물다
7.5조의 정형인데다 표현이 민요풍으로 소박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헤어짐의 애절함이 사람의 마음을 저리게 해서인것 같다.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는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음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는 밤 새워 울겠다는 반어적 표현이다.
헤어짐이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려는 허세가 헤어짐의 아픔을 더하게 한다.

작곡가 정회갑 씨가 진달래꽃을 작곡한 것은 서울음대 재학시절이었다.
해방된지 2년, 일제의 쇠사슬에 풀려난 감격도 차츰 가라앉고 국민은 혼란한 세파속에서 끼니를 이어가기에 바빴다.
전주의 정씨 부모는 어지러운 세상을 보고 아들이 법학이나 의학공부를 하길 원했다.
판 검사나 의사가 되면 어떤 세상이든 편안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부모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씨는 부모의 간곡한 소원을 등지고 서울 음대에 들어갔다.
그의 부모는 "내 자식이 극장귀신이 될 짓을 하다니..." 하고 탄식을 했다.
등록금도 보내주지 않았다.
기거하고 있던 숙부집에서도 짐을 들고 나와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자식들에게 음악을 시키려는 부모는 극히 드물었고 시골서는 악기는 기방이나 곡마단에서나 만지는 것이란 생각으로 가득했고,  음악하는 사람은 광대라고 깔보며 업신여기던 시절이었다.

정씨는 고학을 해야만 했다. 그는 평소 소월의 시집을 곧잘 펼쳤다.
암송하는 시가 많았다.
하숙방에 드러누워 소월의 싯구를 읊조리면 피로가 가시고 괴로움이 사라지는것 같았다.
[진달래꽃]의 작곡 계기를 그의 주위는 흔히들 '사랑'때문이었을것이라고 말한다.
"고학을 하느라 저의 대학시절에는 이성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대학 시절의 저는 소월을 헛읽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정씨에게는 연애할 시간도, 돈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그는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양친의 눈초리는 차가왔다.
집안 분위기가 이렇게 되자 그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싫어졌다.
집 뒷산 솔밭에 드러누워 소월을 읊었다.
애송시는 [진달래꽃] 과 [먼 후일]이었다.
그는 진달래꽃을 읊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 시는 이성간의 사랑만을 읊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부모님은 나를 버리려 한다. 나는 부모의 애정을 붙들어 두고 싶다.
그러나 원망할 것이 아니라 말 없이 보내드려야겠다.
언젠가는 나를 이해하고 내게로 돌아올것이 아닌가...확신하고 그는 이 시에 곡을 붙였다.
깨달음은 원망의 응어리를 서서히 풀어갔다.
연인간의 사랑을 노래한 이 시가 작곡가에게는 부모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던것이다.

"이시는 자기를 버리고 떠나는 임을 원망할 줄조차 모르는 순수한 심정을 노래한 것이 아닐까요?
이런 심정이 우리 겨레의 심정이죠.극기를 통한 우리민족의 높은 애정세계."
정씨는 작곡 당시의 심정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곡을 작곡하면서 청년시절엔 누구나가 한번은 시인이 된다는 말을 실감했어요"

이 가곡은 6.25 동란으로 그가 고향에 피난 가 있을 때 천길량(당시,전주교대교수)씨의 독주회를 위해 완성했다. 구름제의 시 [음3월]도 이 시기의 작품인데 짧은 시간에 작곡되었으나 전란의 긴박감 속이어선지  두 곡 다 깊이있는 가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씨는 1923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서울 음대를 나와 모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1년 가얏고와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을 발표하여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65년 하와이의 동서문화센타가 주최한 동서문화예술제에 출품되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가야금 연주를 맡았던 황병기씨는 미국 여러곳에서 이 작품을 연주하여 호평을 받았다.
또 피아노 조곡 '한국무곡'은 프랑스의 보아 톤시츠가 69년 파리의 세계현대음악제에서 연주하여 갈채를 받았다.
정씨는 1966년 부터 1969년까지 전북과 경기도 농악을 채보하여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적 리듬을 탐구했다.
현대음악을 가르치는 그는 "한 유파에 구애되어서는 안되며 서양음악의 이론에서 벗어나 어떻게 한국적인 음악을 정립시키느냐가 우리의 과제"라고 말한다.

작품으로 '두고온 산하'와 현악4중주곡 등 다수.
1 Comments
이규택 2007.10.30 22:05  
천길량 선생님.  오 현명 선생님과 서울대 동기시라고 레슨중에 말씀하신기억이 납니다.
의대 일학년 여름 방학 부터 2-3년 방학 때 마다 레슨 받은 분이십니다.  의대 생이라고 털끝 만 큼 봐주시는 것도 없고....  Pia cer da mor를3년 을 시키셨다니깐요.  Pia 하면 " 에이 그거 아니고 탄식을 해야지" 주문하시지만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총각이 이별의 탄식을 만들수가 없지요 그러다가 그 여인과 헤어진 후 "Pia.."하니까 "그래 그거야, 그거하는데 3년 걸리냐?"  하시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참으로 좋은 선생님을 만나 평생 노래하는데 얼마나 큰 힘을 얻었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