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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서양음악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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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우리나라의 교육 의료 발전은 물론 민중의 생활전반에 걸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한 변화 가운데 빼놓을수 없는 것이 서양음악의 발달이다.
한국의 음악교육은 찬송가로 부터 시작됐다.선교사들이 가르치기 시작한 찬송가는 당시 징과 꽹과리소리,국악의 음율에 익숙해 있던 민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따라 부르기 쉽게 만들어진 악보가 소개되고 사람들이 찬송가 음에 맞춰 열강의 침략에 맞서 애국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찬송가는 민족의 마음을 표현하는 애국가,예술가곡,대중음악의 형태로 발전하고 신문화운동의 모체가 됐다.

1885년 4월5일 기독교복음을 들고 인천항에 첫발을 내디딘 아펜젤러는 그해 7월6일 우리나라 최초의 오르간예배를 드린다.오르간소리가 울려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듯 초가집에 몰려들었고 아름다운 소리에 반해 버렸다.
아펜젤러가 머물던 초가는 남한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가 되었고 내리교회는 인천지역에 서양음악을 최초로 소개하는 장소가 됐다.서울의 정동제일교회와 새문안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찬송가가 우리말로 처음 발행된 것은 1892년이었다.존스와 로드와일러가 27곡을 우리말로 번역,악보없는 찬미가를 만든 것이다.다음해 언더우드가 사성부 악보를 집성해 1백17곡이 수록된 찬양가를 발행했다.그리고 1895년 감리교에서 찬미가를,장로교에서 찬셩시를 발행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처음 소개된 찬송가는 당시 서구열강의 침략에 비통해 하던 민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줬고 애국가 형태의 노래로 널리불렸다.
“높으신 상주님 자비론 상주님 긍휼히 보소서 이나라 이땅을 지켜주옵시고 오주여 이나라 보우하소서.상주의 권능으로 우리의 대군주 폐하 등극하셨네…”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설립한지 1년이 지난해의 고종황제 탄신일.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의 집례로 고종황제의 탄신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렸다.당시 교인들은 하나님께 의존하며 왕위를 옹위하여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찬양가형태의 이 애국가를 부르며 고종의 탄신을 축하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제의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었을때 전국의 백성들은 원통함을 달래면서 통곡하고 찬송을 불렀다.장로교·감리교가 공동으로 드린 합동추모예배에서 국가적인 슬픔이 찬송가로 승화됐다.
1896년 11월21일 독립문 정초식에서도 찬송가가 불렸다.국내외 고관과 귀빈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재학당 학생들이 음악순서를 맡아 찬송가곡에 음을 붙인 애국가를 불렀다.이에앞서 1895년 대한제국이 독립국가임을 선포했을때도 찬송가곡으로 된 애국가가 전국에서 불ㄹ려졌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찬송가를 정규과목으로 채택해 가르쳤다.정신여학교의 전신인 연동여학교도 한문 역사 지리 산술 도화 습자 채육 가사와 함께 성경과 음악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쳤다.1890년 존스여사가 세운 인천의 영화학교도 창가라 불리는 찬송가를 가르쳤다.
찬송가로 부터 시작된 서양음악은 각 학교마다 합창대와 취주악대가 조직되면서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이화여고 연희전문의 합창단과 취주대는 전국을 순회하며 연주하고 전도활동을 벌였다.이화합창단과 연희합창단은 헨델의 메시아 중에서 `할렐루야'를 선보였으며 당시 연주와 서양음악의 불모지인 대중들을 경탄케 했다.

1932년 연희전문에서는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음악경연대회를 처음 시작,음악경연대회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대중음악의 진일보를 가져왔다.
이처럼 교회와 미션계통의 학교가 서양음악의 산실로 계속발전해 가면서 교회는 수많은 음악천재들을 배출했다.안익태 나운영 홍난파 박태준 최영섭 장학일 박재훈 구두회 김두완 전희준 백경환 최동선 오현명 홍혜경 김인혜 고성현 박인수 임웅균 등 일일이 열거하기 쉽지 않다.

안익태는 평양숭실학교가 배출한 세계적인 작곡가.안익태는 숭실학교에 다니면서 찬송가에 매료되어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코리아 환타지'를 작곡했다.
박태준도 숭실학교출신으로 미국 테스쿨런대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음악대학원을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후진을 양성한 서양음악개화기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평양숭실학교는 창학당시부터 서북지방의 음악활동의 중심이었으며 악익태 박태준외에도 김인식 김영환 현제명 김세형 등 서양음악의 선구자들을 배출했다.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을 비롯해 장학일 윤학원씨등은 인천내리교회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인천내리교회는 1954년 국내 처음으로 헨델의 메시아전곡을 연주해 음악사에 금자탑을 쌓았다.
헨델의 메시아는 1960년대초부터 연합성가대에 의해 전곡이 연주되면서 대중들에게 서양음악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영락교회는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엘리야'를 박재훈의 지휘로 1970년 1월1일 시민회관 무대에 올렸다.박재훈씨는 `에스더'전 3막을 작곡,1972년 4월6일부터 8일까지 시민회관에서 공연했다.에스더는 1986년 김자경오페라단에 의해 다시 세종문화회관에 올려졌다.1973년에는 5월11일 하이든 작곡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연주되는 등 명곡들이 교회조직에 의해 연주되면서 음악발전의 단계를 높여 나갔다.

국민일보 이승한 기자 /199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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