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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음악이 흐르는 도시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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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일보]2005-05-25

대구시가 의기소침한 시민들의 정서순화를 위해 총 사업비 26억원을 투자해 관객을 불러 모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있는 곳은 어디나 찾아가서 연주하는 이른바 ‘거리 음악회’ 등 120개의 이벤트를 개최하여 ‘멜로디가 흐르는 도시’를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지역 경제가 아직도 만족할 수준에 이르지 못해 시민들의 살림살이가 좀처럼 피어나지 않고 있는 마당에 모처럼 들어보는 낭보로 참으로 반갑다.

사실 3공화국 이후 5공화국까지 30여 년 동안 3명의 대통령을 배출했고, 그들의 신분이 군인이었다는 이미지 때문에 외지 사람들은 대구사람들을 일러 권력 지향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본디부터 대구는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시민들로 넘치는 예향(藝鄕)이었다.
많은 도시들이 미술이나, 음악, 문학가 중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훌륭한 예술가를 한 사람만 배출해도 예향이라고 부르나, 대구는 이런 도시와 달리 각 장르별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훌륭한 예술가를 배출함으로 이들 도시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시 말해서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과 시인 유치환, 김춘수를 배출한 경남 통영과 소치 허련(1809~1892) 직계 4대가 전통 남종화(南宗畵)의 맥을 계승 발전시키고 서정주 시인을 배출하여 예향으로 자리 매김 된 남도(南道)와는 다르다는 뜻이다.

비록 소치보다는 후대 사람이기는 하나, 당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화가이자 대원군 이하응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중국, 일본의 서화가들과도 교류를 했던 서병오(1862~1935)와 그 제자 서동균(1902~1978)은 서예가로, 주옥같은 시(詩) ‘봄은 고양이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 가’가 국어 교과서에 등재된 이장희(1900~1929)∙이상화(1901~1943), 대구시민의 노래를 작사한 백기만(1901~1969) 등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구 출신 문화∙예술가이다. 또 경주 출신이지만 젊은 날 대구에서 활동한 박목월은 시인으로, ‘운수 좋은 날’의 작가이자 동아일보 재직 시 손기정 선생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현진건(1900~1943)은 소설가로, 현역 중견 미술평론가들로부터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은 ‘가을 어느 날’ ‘경주 산곡에서’ 작가 이인성(1912~1950)은 미술가로, 이제 이야기기 하고자 하는 박태준, 현제명, 김진균은 음악가로 이들 모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활동한 대구 출신 예술가들이다.

전국의 어느 도시가 양적이나, 질적으로 이만한 우수한 예술가를 배출한 도시가 있단 말인가.
한국합창운동의 선구자인 박태준(1900~1986)은 중구 남성로에서 태어났다. 제일교회에서 합창단을 지휘하던 요절한 형 박태원으로부터 음악적 영향을 받아 대남학교와, 계성학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음악교사 등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하여 학위를 받고 ‘대구성가협회’ 라는 대구 최초의 합창단을 조직하여 창단연주회를 개최함으로 대구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자리를 옮겨 숭실전문학교, 연세대학교수를 역임했으며, ‘물새발자욱’과 ‘뜸북새’라는 동요집을 내는 등 무려 150여 곡을 작곡하고 수많은 합창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합창분야를 개척했다.

음악사의 큰 별인 현제명(1903~1960) 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제일교회를 다니면서 박태원이 조직한 성가대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음악에 접하고 대남학교, 계성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합창단의 일원으로 노래를, 교회에서는 오르간과 바이어린으로 반주를, 악대부에서 코오넷을 불며 음악적 재능을 키워나갔다. 졸업 후 전주 신흥중학교 음악교사를 지내다가 숭실전문학교 재학 시 인연을 맺은 미국인 로디히비의 주선으로 유학길에 올라 시카고 무디성경학교를 거쳐 건(Gunn)음악학교에서 성악(聲樂)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 가곡(歌曲)으로 일컬어지는 ‘고향생각’과 ‘산들바람’은 낮선 미국 땅에서 고향 대구를 그리워하며 작곡한 작품이라고 한다.
조선음악가협회를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1933년에는 당시 쌍벽(雙璧)을 이루던 홍난파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작곡발표회를 개최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모교인 건 음악학교에서 ‘자연발성법’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3년 경성음악연구원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였고 해방 후 이 기구가 경성음악학교로 바뀌었다가 다시 서울대학교 음대가 됨으로 초대학장이 됐다.
1949년 한국음악가협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으며 ‘춘향전’과 ‘왕자호동’을 작곡. 공연함으로 우리나라 오페라 사(史)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예술가곡과 음악학의 선구자 김진균(1925~1986)은 중구 계산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항일운동을 했던 관계로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보살핌으로 자랐다.
계산성당에 다니며 음악에 접해 희도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대륜학교에서는 오르간과 피아노를, 대구사범에서는 음악 전반을 공부하고, 1951년 작곡발표회를 가질 만큼 작곡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강했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 ‘한국 민요의 비교 음악학적 고찰’이란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계명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김진균 가곡집’과 가곡집 ‘초혼’을 냈으며 ‘예술 가곡은 그 나라의 언어적 특성과 언어의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작곡활동을 했다. 경북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서양음악사>와 <음악과 전통>이란 음악이론서를 냈으며 일생동안 25펀의 논문과 85곡의 가곡을 남겼다.

이분들 이외에도 대구에서 음악 활동을 한 분으로 강원도 홍천 출신이면서도 대구음악가협회장으로 지역 음악발전에 크게 기여한 하대응(1914~1987), 경북 안동 출신으로 대구음악학원을 설립하여 독창과 자곡활동을 왕성하게 했던 권태호(1903~1972)등은 대구는 물론 우리나라 음악발전에 디딤돌 역할을 한 분들이다.
따라서 금년에 실시할 ‘음악이 흐르는 도시’도 이들이 쌓은 밑거름이 토대가 되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알차게 추진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몇 가지사항을 제안 하면 첫째 이들 음악가에 대한 재조명 즉 선양(宣揚)작업이 어떤 형태로던 있어야 하고 둘째 공연 작품에도 이들이 작곡, 작사한 노래가 많이 포함되어야 하며 셋째, 이러한 행사를 1회성 행사로 끝내지 말고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작곡된 오페라이자 향토출신 현제명이 작곡한 ‘춘향전’과 ‘왕자호동’이 대구오페라 하우스의 무대에 반드시 올려져야 한다.
지방 도시로서는 처음으로 지어져 대구시민을 자랑스럽게 하는 대구오페라하우스에 대구 출신이 작곡한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가 왜 공연되지 않는지 그 까닭을 이해 할 수 없다. (수필가∙‘달구벌 얼 찾기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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