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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시인들의 사랑 행간에 구구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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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사랑.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두 낱말의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장을 살펴볼 수 있게 됐다.
시 전문 계간지인 ‘시인세계’(문학세계사) 겨울호는 ‘시인의 사랑, 사랑의 시’라는 제목 아래 기획특집을 마련, 우리나라 현대시사 100년에 걸쳐 가장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시를 남긴, 대표적 시인들의 사랑과 시를 소개하고 있다.
이상 김영랑 백석 유치환 모윤숙 박목월 한하운 등 7명의 시인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사랑에 관한 ‘전설’은 이미 세인들의 입방아에 구구히 올랐으나, 시를 통해 그들의 사랑에 접근해간 한편 한편의 글들은 또다른 느낌으로 ‘전설’을 현재화한다.
이상의 연심이, 김영랑과 최승희, 백석의 자야, 한하운과 R 등 실제 인물과 시인의 심상에 박혀 있는 연인의 상이 오버랩되면서 시인의 사랑은 현실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거기에는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연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상과 현실, 관념과 실재, 사랑과 증오를 오가며 결국에는 시인의 시 세계를 자극하고, 파괴하며, 더욱 풍성하게 하는 사랑과 시의 이중주가 요란하게 또는 나지막이 울려 퍼진다.
김영랑이 일찌감치(불과 15세의 나이에) 사별한 첫째 부인을 그리며 쓴 시는 어떤가. “쓸쓸한 뫼앞에 후젓이 앉으면/마음은 갈앉은 양금줄같이/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넋이는 향맑은 구슬손같이/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시 ‘쓸쓸한 뫼앞에’ 전문)
그런가하면 한하운의 애간장이 끊어지는 사랑시도 있다. “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한식에 소복이 통곡할 때에//(중략)//봄마다 피는/옛날의 진달래꽃은//무너질 수 없는/님이 쳐다보는 얼굴//(하략)”(시 ‘려가(驪歌)’ 중에서) 시인이 사랑한 R는, 나환자였던 한하운의 인생만큼이나 구구절절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병력을 알고 자살하려는 한하운을 붙잡아준 R는 모든 것을 바쳐 시인의 삶을 이어가게 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도 이땅의 역사 앞에서 무너져내려 해방이후 북한에서 한하운의 동생과 R는 형무소에 수감되고, 한하운만 단신 월남하였다. 생이별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곡 ‘이별의 노래’의 주인공은 박목월이다. “기러기 울어예는/하늘 구만리/바람이 서늘 불어/가을은 깊었네/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한낮이 기울며는/밤이 오듯이/우리의 사랑도/저물었네/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시 ‘이별의 노래’ 중에서) 박목월과 서울의 명문여대생 H의 사랑 이야기는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답게 갖가지 주해를 낳으며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연인과 광인과 시인은 동일한 존재”라고 갈파한 셰익스피어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시인과 사랑’이라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 깊어가는 가을에 느껴보는 것이 어떨는지.

[문화일보] 2003-11-11/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kr" rel="nofollow">zerokim@munhw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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